90초 뒤의 너
인쇄소 골목은 밤 열한 시 반이면 다른 도시가 된다.
낮에는 지게차와 오토바이와 종이 뭉치와 고함이 뒤섞이는 곳인데, 지금은 셔터마다 노란 가로등이 하나씩 얹혀 있고 잉크 냄새만 바닥에 깔려 있다. 발소리가 벽에 부딪혀 두 배로 돌아온다.
수빈은 첫 핑이 찍힌 지점에 1분 40초 만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었다. 당연하다. 90초 전의 점이다. 90초면 재우 걸음으로 150미터.
두 번째 핑. 28:30.
점이 북동쪽으로 옮겨져 있었다. 청계천 방향. 골목 두 개.
"청계천으로 나가진 않아."
구역 경계가 청계천이다. 나가면 실격. 그러니 저 놈은 경계를 따라 동쪽으로 훑다가 어디선가 꺾어 다시 내려올 거다. 항상 그랬다. 재우는 경계선 타는 걸 좋아한다. 아슬아슬한 게 좋다고.
수빈은 두 골목을 한 번에 가로지르는 대신, 동쪽으로 한 블록 먼저 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앞질러 가서 목을 지키는 것. 사냥의 기본.
폰이 떨렸다. 채팅.
[재우: 뛰는 소리 들린다 ㅋㅋ]
수빈은 뛰면서 한 손으로 쳤다.
[수빈: 그거 네 심장 소리야]
[재우: 내 심장은 평온해]
[수빈: 90초 뒤에 확인해 줄게]
세 번째 핑. 27:00.
점이 예상보다 훨씬 동쪽에 있었다. 뛰고 있다. 걷는 게 아니다. 저 놈, 채팅 치면서 뛰고 있었다.
수빈은 속도를 올렸다. 러닝화 밑창이 젖은 아스팔트를 때렸다. 왼쪽 골목, 오른쪽 골목, 셔터, 셔터, 오토바이, 파레트. 골목 끝에 가로등이 하나 있고 그 아래로—
후드.
30미터 앞. 회색 후드가 가로등 밑을 지나가다 멈췄다. 고개가 돌아왔다.
눈이 마주쳤다.
0.5초. 그리고 재우가 씩 웃었다.
"어."
"어."
동시에 움직였다. 재우가 오른쪽 골목으로 꺾었고 수빈은 그 뒤를 물었다. 30미터. 25미터. 재우는 빠르다. 다리가 길다. 하지만 수빈은 일주일에 세 번 한강을 뛴다. 20미터.
"야, 너 진짜 뛰네!"
재우가 뒤돌아보지도 않고 외쳤다. 숨 안 찬 목소리. 재수 없다.
"뒤돌아보지 마, 넘어져!"
"걱정해 주는 거야?"
"잡기 편하라고!"
재우가 세운상가 뒤편으로 파고들었다. 공사 펜스 사이의 좁은 틈. 수빈이 도착했을 때 그 틈으로 후드가 빨려 들어가는 게 보였다. 펜스 사이 폭이 어깨 하나만큼이다. 수빈은 몸을 틀어 밀고 들어갔다. 철판이 바람막이를 긋었다.
반대편으로 나왔을 때 재우는 없었다.
세운상가 뒷마당. 파레트가 산처럼 쌓여 있고, 폐기 조명 박스들이 벽을 이루고, 그 사이 통로가 세 갈래로 갈라졌다. 발소리가 없다.
수빈은 숨을 고르며 서 있었다. 뛰는 걸 멈추면 심장 소리가 크다. 귓속에서 쿵, 쿵.
네 번째 핑. 25:30.
지도를 봤다. 점은 뒷마당이 아니라 벌써 을지로 큰길 쪽에 찍혀 있었다. 남쪽. 그새 파레트 산을 돌아서 반대편 출구로 빠졌다.
"미친 놈."
[재우: 심장 확인해 줬어?]
[수빈: 곧.]
수빈은 뒷마당을 가로질렀다. 세 갈래 중 남쪽 통로. 달리기가 아니라 판독이다. 저 놈이 큰길 쪽으로 빠졌다는 건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겠다는 뜻이다. 을지로 큰길은 아직 택시가 다니고, 편의점이 켜져 있고, 그리고 그 건너편—
노가리 골목.
다섯 번째 핑. 24:00.
점이 노가리 골목 초입에 찍혔다.
수빈은 큰길로 뛰어나왔다. 택시 한 대가 지나가며 경적을 짧게 울렸다. 건너편으로 뛰어 건넜다. 노가리 골목은 금요일 밤 열두 시 직전이라 아직 살아 있었다. 플라스틱 테이블, 초록 소주병, 웃음소리, 담배 연기, 그리고 골목을 채운 사람들.
수빈은 골목 초입에 서서 숨을 골랐다. 사람들 사이를 훑었다. 회색 후드. 회색 후드. 회색 후드는 스무 개쯤 있었다. 젠장, 금요일 밤 을지로에 후드가 이렇게 많을 줄은.
여섯 번째 핑. 22:30.
점이 골목 중간에 찍혀 있었다. 정확히는 골목 중간의 건물 하나 위에. 그리고 그 뒤로 60초가 지나도록 채팅이 오지 않았다. 재우가 조용할 때는 두 가지다. 숨었거나, 숨을 준비를 하거나.
수빈은 그 건물을 봤다. 노란 간판. 풍년호프. 안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창문 너머로 새어 나왔다.
"들어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