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화면

수빈은 뛰지 않았다.

멈춘 사냥감은 숨은 사냥감이다. 숨은 사냥감에게 뛰어가는 건 발소리로 미리 알려 주는 짓이다. 그래서 걸었다. 발끝으로. 러닝화 밑창이 소리를 거의 안 낸다는 걸 확인하면서.

파레트 야적장이 있는 골목은 인쇄소 골목 중에서도 제일 깊다. 가로등이 두 개뿐이고 하나는 깜빡거린다. 양쪽으로 셔터 내린 인쇄소가 늘어서 있고, 그 사이에 나무 파레트가 사람 키보다 높게 쌓여 벽을 이루고 있다. 그 뒤에 숨으면 앞에서는 안 보인다.

수빈은 파레트 벽을 왼쪽에 두고 천천히 걸었다. 심장이 시끄럽다. 숨을 죽였다.

핑. 15:00.

점이 여전히 같은 자리. 20미터 앞. 파레트 벽 뒤 어딘가.

"거기 있는 거 알아."

작게 말했다. 대답은 없었다. 물론 없겠지.

수빈은 한 걸음 더 내디뎠고—

옆 골목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재우가 아니었다.

남자. 50대. 정장 바지에 셔츠. 완전히 취해서 몸이 반쯤 꺾여 있었다. 옆 골목 어둠에서 비틀거리며 나오다 수빈의 어깨를 정면으로 들이받았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수빈의 팔을 붙잡았다.

"어이— 아, 아가씨, 미안—"

손이 팔을 꽉 쥐고 있었다. 소주 냄새가 얼굴로 쏟아졌다. 남자는 수빈의 팔에 매달린 채 균형을 잡으려고 했고, 그 바람에 수빈의 몸이 파레트 벽 쪽으로 반 걸음 밀렸다.

수빈의 머릿속이 한순간 계산을 했다. 골목. 어둠. 사람 없음. 모르는 남자. 팔을 잡은 손. 뒤에는 나무 벽.

몸이 굳었다.

그 순간 바람막이 주머니 속 폰이 세게 울렸다. 길게, 세 번. 그리고 진동은 멈추지 않았다.

수빈은 잡힌 팔로도 알았다. 화면이 빨갈 거다.

[정지]

파레트 벽 뒤에서 발소리가 터져 나왔다. 뛰는 소리. 파레트 모서리를 돌아서 재우가 나왔다. 후드가 벗겨져 있었다. 그는 남자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대신 두 걸음으로 수빈과 남자 사이에 몸을 밀어 넣었고, 남자의 손이 수빈의 팔에서 떨어져 나갔다.

"괜찮으세요? 저희 일행이에요."

목소리가 이상하게 차분했다. 재우가 남자의 어깨를 받쳐 세웠다.

"아, 아... 미안해요, 미안. 넘어질 것 같아서—"

"네, 괜찮습니다. 큰길은 저쪽이에요."

남자는 몇 번 더 미안하다고 하면서 큰길 쪽으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골목 끝 가로등 아래를 지나 사라졌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정적.

재우가 뒤돌아섰다. 수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손이 아주 조금 떨리고 있었다.

"나 괜찮았어."

수빈이 말했다.

"몰랐으니까."

재우가 말했다.

수빈은 자기 어깨 위의 손을 봤다. 그리고 그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었다.

규칙은 정지 사유를 묻지 않는다. 물을 필요가 없었다. 20미터 뒤 파레트 틈으로 본 것은 술 취한 아저씨가 여자친구 팔을 잡고 비틀거리는 장면이었을 거고, 그건 사실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재우는 그 아무 일도 아닌 것을 보고 0.5초 안에 버튼을 눌렀다. 게임을 버렸다. 30분을 채울 수도 있었던 게임을.

"네 얼굴이 굳었어. 그러면 게임이 아니야."

수빈은 재우의 얼굴을 끌어내려 입을 맞췄다. 짧게. 세게. 소주 냄새 대신 맥주 냄새와 땀 냄새.

"이래서 하는 거야."

"뭘."

"이 게임. 네가 멈추니까."

재우가 숨을 내쉬었다. 떨림이 가라앉았다. 그는 수빈의 어깨를 한 번 꽉 쥐고 놓았다.

"타이머."

수빈이 폰을 꺼냈다. 빨간 화면. 그 위에 하얀 숫자.

14:22.

정지. 남은 시간 14분 22초.

"다시 할래?"

재우가 웃었다. 이번엔 조금 못마땅한 웃음.

"위치 다 공개됐잖아. 내가 여기 있는 거 다 봤잖아."

"30초 줄게. 눈 감고 셀게."

"30초?"

"뛰어."

재우는 후드를 다시 뒤집어썼다. 그리고 딱 한 걸음 물러섰다가 멈췄다.

"눈 안 감아도 돼. 30초면 충분해."

"충분하겠지."

"그리고—"

"뭐."

"버튼 누르길 잘했어."

"알아. 뛰어."

재우가 뛰었다. 파레트 벽 사이로, 인쇄소 골목 더 깊은 곳으로. 수빈은 눈을 감았다. 발소리가 멀어지는 걸 들었다. 하나. 둘. 셋. 아스팔트를 때리는 소리가 골목 벽에 부딪혀 두 개로 갈라지고, 넷, 다섯, 그러다 하나로 합쳐지고, 여섯, 일곱, 점점 작아졌다.

스물아홉. 서른.

눈을 떴다. 빨간 화면 위 [재시작]을 눌렀다. 화면이 하얗게 돌아왔고 숫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14:21. 14:20.

수빈은 뛰었다.

* * *

14분은 길지 않다. 하지만 30초 먼저 출발한 사냥감에게 14분은 짧지도 않다. 문제는 재우가 어느 쪽으로 갔느냐다. 인쇄소 골목 안쪽으로 뛰었다는 건 알았다. 발소리가 그쪽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쪽은—

수빈은 지도를 안 봐도 알았다. 이 구역에서 뛰는 건 여섯 번째다. 인쇄소 골목 안쪽은 세운상가 뒷벽에서 끝난다. 좌우로 빠지는 길이 두 개. 하나는 큰길로, 하나는 청계천으로. 청계천은 경계라 못 나간다. 큰길로 빠지는 골목은 하나.

그 하나를 먼저 막으면 저 놈은 갈 곳이 없다.

핑. 13:30.

점은 예상대로 안쪽에 있었다. 아직 빠지는 골목까진 못 갔다.

수빈은 뒤쫓는 대신 방향을 틀었다. 옆 골목으로 우회했다. 우회하면 100미터가 더 들지만, 그 100미터는 저 놈이 나올 출구 앞에 서 있게 해 준다.

핑. 12:00.

점이 빠지는 골목 입구 바로 앞이었다. 수빈은 그 골목 출구에서 큰길 쪽 모서리에 몸을 붙였다. 숨을 죽였다. 골목 안쪽에서 발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빨라지고. 가까워지고.

후드가 모서리를 돌아 나왔다.

"어—"

수빈이 손을 뻗었다. 재우가 몸을 젖혔다. 손끝이 후드를 스쳤다. 옷. 살 아님.

"아, 진짜!"

재우가 돌아서 다시 골목 안으로 뛰었다. 수빈이 뒤를 물었다. 5미터. 이번엔 놓치지 않는다. 골목은 이제 한 방향밖에 없다. 안쪽. 세운상가 뒷벽.

11:30. 11:10.

재우가 왼쪽으로 페이크를 넣었다. 수빈은 그걸 읽었다. 재우는 위기에 몰리면 항상 왼쪽으로 먼저 간다. 몸을 오른쪽으로 틀 준비를 하면서 왼쪽 어깨를 흔든다. 수빈은 오른쪽으로 갔다.

재우의 등이 셔터에 부딪혔다. 막다른 골목. 내려진 인쇄소 셔터. 위에는 깜빡이는 가로등.

수빈의 손이 재우의 손목을 감았다. 후드 소매 아래로 밀고 들어가, 맥이 뛰는 살 위로.

"잡았다."

10:52.

둘 다 숨을 헐떡였다. 재우의 등이 셔터에 붙어 있었고 수빈의 몸이 그 앞을 막고 있었다. 쥐고 있는 손목 안쪽으로 그의 맥박이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평온한 심장이라던 그 심장이.

"심장 확인 완료."

"...아, 진짜."

"눈 안 감아도 30초면 충분하다고 했잖아."

"충분했어. 네가 우회를 할 줄은—"

수빈은 그 말을 끊었다. 입으로.

이번엔 짧지 않았다. 재우의 입술이 벌어졌고 수빈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맥주 맛. 땀 맛. 19분을 도망친 남자의 숨. 수빈은 그의 손목을 놓지 않은 채 다른 손을 후드 밑으로 밀어 넣었다. 배. 땀에 젖어 뜨거웠다. 복근이 손바닥 아래서 움찔했다.

"수빈—"

"쉿."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트레이닝 팬츠 허리춤을 지나, 그 위로. 손바닥에 닿은 것은 이미 완전히 서 있었다. 얇은 천 아래로 형태가 그대로 만져졌다. 딱딱하고 뜨겁고, 손바닥을 갖다 대자 한 번 움찔거렸다.

"뛰는 동안 이랬어?"

"잡힐 것 같을 때부터."

수빈은 손바닥으로 그것을 감싸 쥐고 꽉 눌렀다. 재우의 뒤통수가 셔터에 툭 닿았다. 낮은 신음이 목에서 새어 나왔다. 셔터가 희미하게 울렸다.

수빈은 그의 목에 입을 대고 물었다. 세지 않게. 하지만 자국이 남을 만큼은.

"오늘 밤은 내 거야."

"알아."

"집까지 10분."

수빈은 손을 뺐다. 재우가 숨을 몰아쉬며 셔터에서 몸을 떼려 했다. 수빈이 손목을 놓았다.

"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