져주는 타이밍

부산. 발표 전날 밤. 호텔 1207호.

한 교수님은 학회 지원금으로 방을 두 개 잡아줬다. 지훈 방, 소연 방. 소연은 자기 방에 가방만 던져놓고 지훈 방에 와 있었다. 열 시. 지훈은 침대 위에 노트북을 놓고 벽을 보고 있었다. 벽에 슬라이드를 쏘는 것처럼.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는 벽이었다.

"……본 연구는 뇌신호 데이터 전처리 과정의 자동화를 목표로. 아니. 본 연구에서는. 아니."

"지훈아."

"기존 연구들은 수동 라벨링에 의존하여. 의존해왔으며. 의존하고 있어. 어느 게 맞아."

"셋 다 맞아."

"셋 다 맞으면 뭘 써."

"아무거나."

그는 그녀를 돌아봤다. 눈 밑이 어제보다 더 어두웠다. 부산 오는 기차 세 시간 동안 그는 슬라이드를 열두 번 봤다. 그녀는 옆에서 세었다. 열두 번. 그가 슬라이드를 볼 때마다 안경을 올리는 것도 세었다. 스물세 번.

"처음부터 다시."

그가 말했다. 자기한테. 그리고 리모컨을 들었다. 노트북과 연결된 프레젠터 리모컨. 첫 페이지. 그는 벽을 보고 입을 열었다. 소리가 안 나왔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다시 열었다. 첫 문장. 그리고 멈췄다.

"……"

"지훈아."

"잠깐만."

그는 리모컨을 내려놨다. 두 손을 무릎에 놓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소연은 그걸 봤다. 이 주 전에 연구실에서 마우스 위에서 떨렸던 그 손이었다.

그녀는 알았다. 지금 이 남자가 뭘 필요로 하는지 모르는 채로, 그냥 알았다. 그가 지금 이 방에서 이십 분 더 벽을 보면 내일 발표는 망한다는 걸. 그리고 그녀가 아는 방법은 하나였다.

그녀는 침대로 올라갔다. 그의 노트북 앞에. 그리고 노트북을 닫았다.

"야."

"싫어."

"이소연, 나 지금……"

"알아. 그래서 닫은 거야."

그녀는 리모컨을 집었다. 그리고 자기 브라 안에 넣었다. 그는 그걸 보고 잠깐 멍해졌다.

"뭐 하는 거야."

"압수."

"돌려줘."

"싫어."

"이소연."

"벌칙 하나."

그는 안경을 벗었다. 미간을 눌렀다. 그 동작. 그리고 그녀를 봤다. 그 눈빛. 삼 년 동안 매일 봤던, 벌칙이라고 말하기 직전의 눈빛. 그가 입을 열었다. 소연은 기다렸다. 그가 잡을 것을. 손목을, 허리를, 리모컨을. 그가 이길 것을. 그가 이기면 그는 잠깐 자기가 이 방에서 뭔가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느낄 것이고, 그게 그를 진정시킬 거라고 그녀는 계산했다.

그런데 그가 멈췄다.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녀를 봤다. 오래. 그녀가 지금 왜 이걸 하는지 읽는 얼굴이었다. 그는 그녀의 엑셀 열 이름까지 외우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표정을 못 읽을 리가 없었다.

"소연아."

"뭐."

"너 지금 나 위해서 하는 거지."

"……"

"내가 널 잡으면 내가 진정될 거라고 생각해서."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했다. 그는 항상 정확했다.

"그런데 그거 아니야."

그가 말했다.

"뭐가."

"지금 내가 필요한 건 널 잡는 게 아니야."

그는 안경을 침대 옆에 놓았다. 그리고 침대에 누웠다. 등을. 천장을 봤다. 두 손을 옆에 놓았다. 그리고 말했다.

"오늘은 네가 이겨."

소연은 그를 봤다.

"……뭐?"

"네가 정해. 뭐든. 나 오늘 못 받아. 못 받는 날은 말하기로 했잖아. 그래서 말하는 거야. 못 받아. 대신 네가 해. 네가 정하고 내가 들을게."

"지훈아, 그건……"

"이소연. 부탁이야."

그 단어. 그가 그 단어를 쓴 건 처음이었다. 그녀에게. 그녀는 그 단어가 자기 안에서 어디에 떨어지는지 느꼈다. 깊은 곳이었다. 그가 손목을 잡았을 때보다, 랜야드로 묶었을 때보다, 세 번 참게 했을 때보다 깊은 곳.

그녀는 리모컨을 브라에서 꺼냈다. 침대 옆 테이블에 놓았다. 그리고 그의 위로 올라갔다. 그를 내려다봤다. 그는 그녀를 올려다봤다. 삼 년 동안 항상 그가 내려다봤고 그녀가 올려다봤는데, 오늘 처음으로 반대였다.

"벗어."

그녀가 말했다. 명령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로 나오는 그 목소리.

그는 벗었다. 티셔츠. 그녀가 바지를 벗겼다. 속옷. 그는 아직 서지 않았다. 너무 긴장해서. 그녀는 그걸 봤고 놀리지 않았다. 대신 그의 옆에 누웠다. 그를 안았다. 온몸으로. 그리고 그의 귀에 말했다.

"숨 쉬어."

"쉬고……"

"아니. 내가 세줄게. 들이쉬어."

그녀가 셌다. 넷. 그가 들이쉬었다. 넷. 내쉬었다. 그녀의 손이 그의 가슴에서 배로. 천천히. 그의 호흡에 맞춰서. 다섯 번. 열 번. 그의 몸이 조금씩 풀렸다. 그녀의 손이 더 아래로. 그가 조금씩 서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 안에서.

"이거 봐. 몸은 말 듣네."

"……조용히."

"싫어. 오늘은 내가 이기는 날이야. 조용히 안 해."

그녀는 그의 위로 다시 올라갔다. 자기 옷을 벗었다. 전부. 그가 그녀를 봤다. 그의 눈이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그의 성기가 완전히 섰다. 그녀는 그것을 잡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봤다.

"오늘 규칙."

"……뭐."

"네가 하는 거 하나도 없어. 손도 안 써. 그냥 누워 있어. 내가 다 해. 네가 하는 건 딱 하나야."

"뭐."

"가는 거. 내가 좋다고 할 때."

그가 웃었다. 처음으로. 오늘 밤 처음으로. 그리고 그 웃음이 나온 순간 소연은 자기가 옳았다는 걸 알았다. 아니, 그가 옳았다는 걸. 오늘 필요한 건 그가 이기는 게 아니었다. 그가 져도 세상이 안 무너진다는 걸 아는 거였다.

그녀는 콘돔을 꼈다. 그에게. 그리고 자리를 잡고,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가 들어왔다. 그의 손이 저절로 그녀의 허리로 올라왔다. 그녀가 그 손을 잡아서 침대에 눌렀다. 그의 머리 위로.

"손 안 쓴다고 했잖아."

"……미안."

"벌칙 둘."

그가 웃었다. 그녀 안에서. 그 웃음이 진동으로 전해졌다. 그녀는 움직였다. 천천히. 그를 내려다보면서. 그는 그녀를 올려다봤다. 눈이 풀려 있었다. 삼 주 동안 굳어 있던 얼굴이 아니었다. 이 주 전에 마우스도 못 잡던 얼굴도 아니었다. 그냥 강지훈이었다. 그녀의 밑에서, 그녀의 손목에 잡힌 채로, 그녀를 보고 있는.

"소연아."

"응."

"이거…… 무섭다."

"뭐가."

"통제 안 하는 거."

"알아."

"근데 좋아."

"알아."

그녀는 속도를 올렸다. 그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그가 손을 빼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호흡을 봤다. 빨라졌다. 얕아졌다. 그녀는 속도를 늦췄다.

"숨."

"……"

"지훈아, 숨. 넷."

그는 들이쉬었다. 그녀는 그의 들이쉬는 호흡에 맞춰 내려앉았다. 내쉬는 호흡에 맞춰 올라갔다. 그의 몸이 그녀의 리듬에 맞춰졌다. 그의 호흡이 그녀의 움직임이 됐다. 그의 안에서 뭔가 쌓이는 게 그녀에게 느껴졌다. 그의 허벅지가 떨렸다. 그의 눈이 감기려고 했다.

"눈 떠."

그는 떴다.

"나 봐."

그는 봤다.

"가."

그는 갔다. 그녀 안에서. 그녀를 보면서. 소리가 났다. 낮고, 길고, 끝에 뭔가가 갈라졌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것이. 그녀는 그가 다 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손목을 놓지 않았다.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가 다 가고 몸이 축 늘어졌을 때, 그녀는 손목을 놓고 그의 위로 무너졌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심장이 그녀의 뺨을 밀어 올렸다.

"……봐."

그녀가 말했다. 그의 가슴에 대고.

"뭘."

"말 안 들어도 세상 안 무너지지."

그는 웃었다. 그 웃음에 눈물이 조금 섞였다. 그녀는 그걸 봤고 아무 말 안 했다. 대신 그의 얼굴을 손으로 닦았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거 배우는 데 삼 년 걸렸네."

"난 삼 년 전부터 알았어."

"그러니까 네가 매번 마감을 어겼구나."

"응. 네가 배울 때까지."

그는 그녀를 안았다. 오래. 그리고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옆에서. 침대 옆 테이블. 리모컨을 집었다. 그에게 내밀었다.

"한 번만 더. 처음부터."

"……지금?"

"지금. 아직 열한 시야."

그는 리모컨을 받았다. 노트북을 열었다. 첫 페이지. 벽을 봤다. 알몸으로. 그녀도 알몸으로 그 옆에 앉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본 연구는 뇌신호 데이터 전처리 과정의 자동화를 목표로 합니다."

한 문장. 안 떨렸다. 다음 문장. 안 떨렸다. 두 번째 페이지. 세 번째. 화살표가 맞는 방향으로 그려진 도식. 그는 열여덟 페이지를 다 했다. 십이 분. 안경을 한 번도 올리지 않았다. 쓰고 있지 않았으니까.

"어때."

그가 물었다.

"안경 안 올렸어."

"안 썼으니까."

"내일도 벗고 해."

"그럼 슬라이드가 안 보여."

"슬라이드 안 봐도 되잖아. 다 외웠잖아. 방금 봤잖아."

그는 그녀를 봤다. 그리고 웃었다. 그녀가 삼 년 동안 보고 싶었던 웃음이었다. 벌칙을 정할 때 나오는 그 미세한 웃음이 아니라, 그냥 웃음.

"이소연."

"응."

"벌칙 둘 쌓였어. 손목 잡은 거."

"내가 잡은 거야. 네가 아니고."

"그래도."

"그래도 뭐."

"정산은 내일 밤에."

그녀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가 그녀를 안았다. 열한 시 십오 분. 내일 아홉 시 발표. 그는 잠이 들었다. 십 분 만에. 삼 주 동안 못 잔 사람처럼. 그녀는 그가 자는 걸 봤다. 그리고 리모컨을 그의 손에서 조용히 빼서 테이블에 놨다. 압수는 아니었다. 그냥, 이제 필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