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리비전

소연은 죽을 들고 갔다.

토요일 오전 열 시. 지훈의 방. 그녀는 비밀번호를 누르지 않았다. 노크를 했다. 세 번. 그녀 생일이 비밀번호인 문 앞에서 노크를 하는 건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래야 했다.

문이 열렸다. 지훈. 눈 밑이 검었다. 잠을 못 잔 얼굴. 발표 열흘 전.

"죽."

그녀가 말했다.

"……왜."

"너 어제 점심 이후로 뭐 먹은 거 없잖아. 민재가 말했어. 저녁에 편의점도 안 갔다고."

"민재가 왜 그걸……"

"관중이니까."

그는 문을 열어줬다. 그녀는 들어갔다. 책상 위에 슬라이드가 떠 있었다. 열두 시간 전과 같은 페이지. 그가 밤새 그 페이지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갔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죽을 책상에 놨다. 숟가락을 꺼냈다. 그리고 침대 끄트머리에 앉았다. 팔짱을 끼지 않았다. 다리를 꼬지 않았다. 그냥 앉았다.

"먹어."

"……"

"명령 아니야. 부탁이야."

그는 먹었다. 천천히. 그녀는 그가 먹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젤리를 꺼내지 않았다. 그의 파일명을 보지 않았다. 그가 반쯤 먹었을 때 그녀가 말했다.

"규칙 위반했어. 알아. 위치 옮기는 것도 데이터 건드리는 거야. 네가 그렇게 안 적었어도 그건 내가 알았어야 했어. 삼 년치인 거. 네가 얼마나 그거 아끼는지. 알았어. 아는데 했어."

"왜."

"네가 나 봐줬으면 해서. 그런데 그건 이유가 아니야. 핑계야. 진짜 이유는……"

그녀는 무릎을 봤다. 어제 밤에 천장을 보면서 열 번 연습한 문장이었다. 그런데 소리로 내려니까 어려웠다.

"진짜 이유는 내가 그것밖에 못 해서. 나 얌전하게 하는 법 몰라. 그냥 옆에 앉아서 '힘들어?' 이렇게 묻는 거. 못 해. 삼 년 동안 안 해봤으니까. 네가 힘들어 보이면 뭘 던져. 그럼 네가 받고. 그게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이야. 근데 이번엔 네가 받을 수 없는 상태였고, 나는 그걸 봤는데도 던졌어. 더 크게. 그게 미안해."

지훈은 숟가락을 내려놨다.

"나도 하나 말할게."

"응."

"나 이 주 동안 힘들었어. 발표 때문에. 유나 코드 봐준 것도 사실 슬라이드 보기 싫어서 도망친 거야. 그런데 너한테 힘들다고 안 했어. 네가 던지면 받아야 되는데, 받을 힘이 없다고 말하면 내가 뭔가 지는 것 같아서."

"……"

"테이머는 항상 받아야 되는 사람인 줄 알았어. 검색한 거에 그렇게 적혀 있진 않았는데, 내가 그렇게 읽었어. 그래서 안 받는 대신 그냥 안 보는 걸 택했어. 그게 너한텐 무시로 보였을 거야."

소연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우리 둘 다 규칙을 잘못 읽었네."

"응."

"메이저 리비전이네."

"응."

그는 웃었다. 아주 조금. 열두 시간 만에 처음으로. 그리고 죽을 마저 먹었다. 다 먹었다. 그릇을 내려놨다.

"그래서 어떻게 고칠 건데."

소연은 일어났다. 그의 뒤로 갔다. 의자 뒤. 그리고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는 움찔했다. 그녀가 그의 뒤에서 뭔가를 하는 건 항상 키보드를 노리는 거였으니까. 그런데 그녀의 손은 어깨에 있었다. 그리고 눌렀다.

"뭐 해."

"마사지."

"……왜."

"네 어깨 돌덩이야. 삼 주 동안 이랬어? 내가 왜 못 봤지."

그녀는 눌렀다. 진짜로. 그의 어깨, 목, 등. 그는 처음엔 몸이 굳어 있었다. 그러다가 조금씩 풀렸다. 그녀의 손 아래에서. 그가 눈을 감았다.

"슬라이드 몇 페이지야."

"열여덟."

"세 번째 페이지에서 왜 막혔어."

"그림. 전처리 파이프라인 도식. 뭔가 이상한데 뭐가 이상한지 몰라."

소연은 마사지하는 손을 멈추지 않으면서 모니터를 봤다.

"화살표 방향. 세 번째 박스에서 네 번째로 가는 화살표가 거꾸로야. 라벨링이 아티팩트 제거보다 먼저 오는 것처럼 그려져 있어."

지훈이 눈을 떴다. 화면을 봤다.

"……그러네."

"삼 년 동안 그 순서로 한 사람이 나잖아. 데이터는 내가 정리했어."

"그러네."

그는 화살표를 고쳤다. 십 초. 삼 주 동안 못 나가던 페이지가 십 초에 넘어갔다. 그녀는 계속 눌렀다. 그는 네 번째 페이지를 봤다.

"이건."

"결과 그래프. 이상 없어. 넘겨."

"다섯 번째."

"수치 표. 소수점 셋째 자리까지 하지 마. 둘째까지. 학회 사람들 안 읽어."

그는 넘겼다. 그녀는 눌렀다. 페이지가 열두 개 넘어갔다. 그녀의 손이 그의 등에서 목으로, 목에서 머리로. 그는 어느 순간 뒤로 몸을 기댔다. 의자 등받이가 아니라 그녀 쪽으로. 그녀의 배에 그의 뒤통수가 닿았다.

"소연아."

"응."

"이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뭘."

"내가 이런 거 필요하다는 거."

"말 안 해. 근데 나한테는 말해. 다음부터. 필요하면."

"……응."

열여덟 페이지. 끝. 그는 저장했다. 한 번만. 그리고 의자를 돌렸다. 그녀를 봤다. 그녀는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얌전하게. 그게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처럼 보였고, 그래서 더 이상하게 예뻤다.

"이소연."

"응."

"억셉?"

그녀가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몸 어딘가가 풀렸다. 그가 물었다. 그녀에게. 하루 만에. 리젝에서 리비전에서 억셉까지. 그건 규칙이 진짜라는 뜻이었다. 세이프워드가 침대에서만 쓰는 게 아니라, 진짜로 멈추고 진짜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라는 뜻이었다.

"억셉."

그는 그녀를 끌어당겼다. 무릎 위로. 그녀는 그의 위에 앉았다. 얼굴을 마주 보고. 그가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았다. 키스했다. 어제의 침묵이 다 녹을 만큼 길게.

그들은 침대로 갔다. 이번엔 그가 그녀를 들지 않았다. 손을 잡고 걸어갔다. 세 걸음. 그리고 서로를 벗겼다. 동시에. 그가 그녀의 티셔츠를 올리는 동안 그녀가 그의 티셔츠를 올렸다. 팔이 엉켰다. 둘 다 웃었다.

그녀가 그를 눕혔다. 그가 눕게 뒀다. 그녀가 위로 올라갔다. 그의 허벅지 위에. 그의 성기가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있었다. 이미 단단했다. 그녀는 그것을 잡았다. 천천히 문질렀다. 그가 숨을 들이켰다.

"오늘은 내가 이겨도 돼?"

그녀가 물었다.

"……응."

"진짜?"

"응. 오늘은."

그녀는 콘돔을 꼈다. 그에게. 그리고 자기 위치를 맞춰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가 들어왔다. 그녀는 소리를 냈다. 그도 냈다. 그녀는 끝까지 내려앉아서 멈췄다. 그를 봤다. 그는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풀려 있었다. 삼 주 동안 봤던 그 굳은 얼굴이 아니었다.

"숨 쉬어."

그녀가 말했다.

"쉬고 있어."

"안 쉬고 있어. 삼 주 동안 안 쉬었어."

그는 숨을 쉬었다. 깊게. 그녀는 그 호흡에 맞춰 움직였다. 천천히. 올라갔다가 내려앉았다가.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그런데 이끌지 않았다. 그냥 잡았다. 그녀가 리듬을 정했다. 그가 따랐다.

"소연아."

"응."

"이거…… 좋다."

"뭐가."

"네가 정하는 거."

그녀는 웃었다. 움직이면서. 그리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서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장. 빨랐다. 그녀는 속도를 올렸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허리를 파고들었다. 그녀 안쪽에서 뭔가 쌓였다. 어제의 두려움과 오늘의 안심이 같은 자리에서 뒤섞여 쌓였다.

"지훈아, 나……"

"허락 필요 없어. 오늘은."

그녀는 갔다. 그의 위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를 조이면서. 그는 그녀가 가는 동안 그녀를 봤다. 눈을 안 감고. 그리고 그녀가 다 가서 그의 가슴 위로 무너졌을 때, 그는 그녀를 안고 허리를 밀어올렸다. 몇 번. 그리고 그도 갔다. 그녀 안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소연아, 라고. 아, 를 붙여서.

한참 뒤. 두 사람은 옆으로 누워 마주 보고 있었다. 십 센티미터. 아니, 영.

"이제 벌칙 몇 개 남았어?"

소연이 물었다. 얌전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원래 목소리였다.

"전부 사면."

"뭐?"

"열네 개. 전부 없어. 리셋."

"아 재미없어."

지훈이 웃었다. 소리 내서. 그리고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럼 월요일부터 다시 쌓아."

"쌓을게. 근데 하나만."

"뭐."

"네가 못 받을 때. 말해. '오늘은 못 받아.' 그러면 나 안 던져. 대신 죽 사 올게."

"……알았어."

"그리고 나도. 내가 진짜로 뭐 힘들면. 던지는 대신 말할게. 노력할게. 연습해야 되겠지만."

"연습하자."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붉은 자국이 없는 손목을. 그냥 잡았다. 놓지 않았다. 몇 초든 상관없었다.

월요일. 화이트보드 우측 하단. '누적: 0'. 그 옆에 '정산 완료: 0'. 그리고 새 줄이 하나 생겼다. 반듯한 글씨로.

'못 받는 날: 말하기.'

민재가 그걸 보고 뭐라고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두 선배가 다시 싸우고 있었으니까. 파일명 때문에. 연구실이 다시 시끄러웠다. 그는 그게 안심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