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게 놀아

"지훈 선배, 이거 잠깐만 봐주실 수 있어요?"

유나였다. 밤 열 시. 연구실에는 세 명이 남아 있었다. 지훈, 소연, 유나. 유나는 노트북을 들고 지훈 자리로 갔다. 소연은 자기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보고 있는 척을 했다.

"어디."

"이 부분이요. 손실 함수가 수렴을 안 해서."

지훈은 유나의 노트북을 봤다. 유나는 그의 의자 옆에 서 있었다. 몸을 기울여서. 머리카락이 그의 어깨 근처에 있었다. 소연은 그걸 봤다. 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봤다. 삼 년 동안 팔십 센티미터 거리에 있었으면 시야 각도가 저절로 맞춰진다.

"학습률 낮춰봤어?"

"네. 그래도 안 돼요."

"배치 사이즈는."

"그것도요."

"그럼 데이터 확인해봐. 라벨 분포."

"아, 그건 안 봤어요."

"같이 보자."

같이 보자. 소연은 그 말을 들었다. 지훈이 유나의 노트북을 당겨서 자기 모니터 옆에 놓았다. 두 사람의 머리가 가까웠다. 유나가 웃었다. 지훈이 뭔가 설명했다. 소연은 그의 설명하는 목소리를 알았다. 낮고, 천천히, 상대가 이해할 때까지 기다리는 목소리. 삼 년 전 그녀에게 파이썬을 가르쳐줄 때 그 목소리였다.

그녀는 일어나서 나갔다. 화장실. 거울을 봤다. 얼굴이 평소였다. 그게 이상했다. 속은 평소가 아닌데.

돌아왔을 때 유나는 없었다. 지훈이 그녀를 봤다.

"어디 갔었어."

"화장실."

"이십 분 동안?"

"변비."

지훈은 웃지 않았다. 그녀를 봤다. 그녀는 자기 모니터를 봤다. 그가 뭔가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그날 밤 그녀는 그의 방에 안 갔다.

이틀 뒤 랩미팅. 한 교수님이 발표 일정을 공지했다.

"추계학술대회. 부산. 이 주 뒤. 우리 연구실 구두 발표 하나. 지훈이가 해."

"제가요?"

"응. 뇌신호 전처리 자동화 논문. 그거 네 1저자잖아. 소연이는 2저자니까 같이 가고. 질문 받을 때 데이터 부분은 소연이가 대답하는 걸로."

소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훈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발표를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발표를 앞두면 삼 주 전부터 잠을 못 자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걸 알았다. 삼 년 동안 봤으니까. 학회 전마다 그의 눈 밑이 어떻게 변하는지.

"괜찮아?"

미팅 끝나고 그녀가 물었다.

"응."

"안 괜찮아 보이는데."

"괜찮아."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자기 자리로 갔다. 그녀는 뭔가 더 말하려다 말았다. 대신 화이트보드를 봤다. 14. 정산 완료 7. 이 주 동안 숫자가 안 올라갔다. 그녀가 안 올렸다. 아니, 올릴 기분이 안 났다.

그날 오후 민재가 그녀 옆에 의자를 끌고 왔다.

"선배."

"응."

"요즘 이상해요."

"뭐가."

"안 싸워요. 지훈 선배랑. 이 주 됐어요."

"싸울 일이 없어서 그래."

"거짓말."

소연은 민재를 봤다. 석사 2년차. 이 연구실에서 그녀와 지훈의 랠리를 일 년 반 동안 관람한 유일한 관중. 그는 테니스를 보는 사람이었지만 사실 테니스를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선배, 유나 선배 신경쓰죠."

"뭐?"

"지훈 선배가 유나 선배 코드 봐줄 때마다 화장실 가잖아요. 세 번 봤어요."

"……세지 마."

"두 분 사귀는 거 다 알아요. 저만 아는 게 아니에요. 포닥 형도 알고. 교수님도 알 것 같은데, 그건 확실하진 않고."

소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민재가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상관없어요. 그냥…… 두 분 안 싸우니까 연구실이 너무 조용해서요. 이상하게 그게 더 불안해요."

그는 의자를 끌고 돌아갔다. 소연은 자기 손을 봤다. 화이트보드에 숫자를 안 올린 이 주 동안 자기가 뭘 하고 있었는지 생각했다. 유나를 보고, 지훈을 보고, 화장실에 갔다. 그게 다였다. 그건 브랫이 하는 게 아니었다. 그건 그냥 질투하는 사람이 하는 거였다.

그녀는 그 둘의 차이를 몰랐다. 아니, 알았는데 인정하기 싫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썼다. 옆 연구실 박사과정 선배가 술자리에 부르는 문자를 보냈을 때 그녀는 갔다. 원래는 안 가는 자리였다. 지훈에게 말했다.

"오늘 옆 랩이랑 술."

"누구."

"정우 선배. 그리고 몇 명."

정우 선배는 소연에게 두 번 고백한 사람이었다. 두 번 다 거절당했다. 지훈은 그걸 알았다. 소연은 지훈이 그걸 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말했다.

지훈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재밌게 놀아."

"……뭐?"

"재밌게 놀라고."

그게 다였다. 그는 코드를 계속 봤다. 소연은 삼 초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가 시계를 볼 줄 알았다. 한숨을 쉴 줄 알았다. 벌칙이라고 말할 줄 알았다. 손목을 잡을 줄 알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그냥 재밌게 놀라고 했다.

그녀는 나갔다. 술을 마셨다. 정우 선배가 옆에 앉았다. 재미없었다. 열한 시에 나왔다. 걸어서 이십 분. 지훈의 방 앞에서 멈췄다. 불이 켜져 있었다. 그녀는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의 방 비밀번호는 그녀 생일이었다. 그가 그렇게 바꿨다. 한 달 전에.

그는 책상에 있었다. 발표 슬라이드. 열두 시가 다 됐는데.

"왔어."

"응."

"재밌었어?"

"아니."

그는 슬라이드를 봤다. 그녀는 침대에 앉았다. 침묵. 이 주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쌓인 침묵이 방을 가득 채웠다.

"왜 안 잡았어."

그녀가 말했다.

"뭘."

"오늘. 나 가는 거. 정우 선배. 너 알잖아 그 사람."

"알아."

"그런데 재밌게 놀라고?"

지훈이 의자를 돌렸다. 그녀를 봤다. 눈 밑이 어두웠다. 이 주 동안 잠을 잘 못 잔 얼굴이었다.

"소연아. 내가 잡았으면 어떻게 됐을 것 같아."

"……"

"네가 이긴 거였겠지. 네가 던진 거에 내가 넘어가면 네가 이기는 거잖아. 나 그거 알아. 규칙이니까."

"그럼 져주면 되잖아. 가끔은."

"오늘은 안 됐어."

"왜."

"오늘은 네가 진짜로 이기고 싶어서 던진 게 아니었으니까. 그냥 나 아프게 하려고 던진 거였으니까."

소연은 입을 다물었다. 정확했다. 이 남자는 항상 정확했다. 그녀의 엑셀 열 이름까지 외우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표정 하나도 못 읽을 리가 없었다.

"유나 때문이지."

"……"

"유나는 후배야. 코드 봐주는 거야. 나 그 애한테 아무 감정 없어. 그거 말로 해야 알아?"

"알아. 아는데……"

"아는데 뭐."

소연은 자기 무릎을 봤다.

"아는데 네가 그 애한테 설명하는 목소리가 삼 년 전에 나한테 하던 목소리라서. 그게 싫었어. 그냥 싫었어. 논리 없어. 미안."

지훈은 한참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일어나서 그녀 옆에 앉았다. 침대에. 십 센티미터.

"화이트보드 이 주 동안 안 올렸잖아."

"응."

"그게 제일 무서웠어."

"뭐가."

"네가 말 안 듣는 걸 안 하는 거. 그건 네가 나를 안 본다는 뜻이니까."

소연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 피곤한 얼굴. 학회 이 주 전. 그리고 이 주 동안 그녀가 던지지 않은 공을 기다리고 있던 얼굴.

"미안."

"나도."

"뭐가."

"뭔가 눌려 있는데 뭔지 몰라서 그냥 코드만 봤어. 물어봐야 했는데."

두 사람은 그렇게 앉아 있었다. 뭔가가 풀린 것 같았고, 뭔가는 안 풀린 것 같았다. 소연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잡게 뒀다. 그게 그날 밤 두 사람이 한 전부였다. 그리고 그건 충분하지 않았다. 소연은 그걸 알았고, 그래서 그다음 날 뭔가를 했다. 뭔가 큰 것을.

그게 실수였다는 걸 아는 데는 이십 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