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가서 정산하자
유나의 논문이 억셉됐다. 석박통합 3년차에 SCI 1저자. 한 교수님은 회식을 선포했고, 회식 장소는 늘 가는 학교 앞 고깃집이었고, 그 집 사장님은 연구실 사람들 얼굴을 다 알았다.
"소연이 오늘 또 뭐 사고 쳤어?"
사장님이 물었다. 소연이 들어오자마자.
"아직요."
지훈이 대신 대답했다. 소연은 그를 한 번 째려보고 자리에 앉았다. 지훈 맞은편. 팔십 센티미터. 연구실 밖에서도 그 거리는 유지되었다. 유지되는 것처럼 보였다.
고기가 익었다. 소주가 돌았다. 한 교수님이 유나의 논문에 대해 십오 분간 이야기했고, 유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고기만 뒤집었다. 포닥 형이 자기 논문 리젝 이야기를 하면서 웃겼고, 민재는 술이 약해서 이미 볼이 발갰다.
소연은 세 잔째부터 시동이 걸렸다.
"교수님, 지훈이 발표할 때 습관 아세요?"
"뭐?"
"슬라이드 넘길 때마다 안경 올려요. 매 슬라이드마다. 스무 장이면 스무 번. 제가 세어봤어요."
"안 올려."
"올려. 그리고 질문 받으면 일단 '좋은 질문이십니다'부터 해. 나쁜 질문에도 그래. 지난번에 어떤 학부생이 '이거 딥러닝이에요?' 물었을 때도 '좋은 질문이십니다' 했어."
테이블이 웃었다. 한 교수님도 웃었다. 지훈은 소주잔을 들었다가 내려놨다.
"이소연."
"응."
"하나."
"뭐가."
"세고 있어."
소연은 그 말에 웃었다. 그리고 그의 접시에서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가져갔다. 그가 막 먹으려고 젓가락을 가져가던 거였다.
"둘."
"이건 벌칙 대상이 아니야. 이건 회식 예절이야."
"셋."
"뭐가 셋이야, 아무것도 안 했잖아."
"방금 그 말투."
소연은 소주를 한 잔 더 마셨다. 얼굴은 안 빨개졌다. 그녀는 술이 셌다. 대신 눈이 더 반짝였다. 그 눈빛으로 그를 봤다.
"강지훈. 너 벌칙 그렇게 남발하면 인플레이션 와. 화이트보드 숫자에 신뢰도가 떨어져."
"넷."
"아, 이건 진짜 억울해."
한 교수님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는지 안 듣는지 모를 표정으로 고기를 먹었다. 삼 년 동안 봤으니 이제 배경음악이었다. 유나는 웃었다. 포닥 형은 폰을 봤다. 민재만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테니스. 오늘은 특히 랠리가 길었다.
소연은 계속했다. 지훈의 소주잔에 물을 탔다. 지훈의 뒤에 있는 티슈를 그의 팔 위로 손을 뻗어 가져갔다. 지훈이 말을 하면 끝나기 전에 말을 받았다. 다섯. 여섯.
"일곱."
지훈이 말했을 때 소연은 그의 안주 접시에 손을 대고 있었다. 쌈장에 찍은 마늘. 그가 좋아하는 거였다. 그녀는 그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가져가려던 거였고, 그런데 그의 손이 그녀의 손 위에 놓였다. 테이블 위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 각도로.
"이소연."
그가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테이블 소음 속에서 그녀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집에 가서 정산하자."
소연은 마늘을 놓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 삼 년 동안 처음으로,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랐다. 입은 벌렸는데 소리가 안 나왔다. 정산. 집에 가서. 그 두 단어의 조합이 머릿속에서 자기 자리를 못 찾고 계속 떠다녔다. 그는 손을 뗐다. 마늘을 먹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녀의 손등에 그의 손바닥 온도가 남았다.
민재가 고개를 돌리다가 멈췄다. 두 선배가 동시에 조용해진 건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는 소주를 한 잔 더 마셨다. 이건 나중에 곱씹을 데이터였다.
회식이 끝났다. 열한 시. 한 교수님은 택시를 타고 먼저 갔고, 유나와 포닥 형은 기숙사 쪽으로 걸어갔고, 민재는 지하철 막차를 잡으러 뛰었다.
소연과 지훈은 같은 방향이었다. 원룸촌. 걸어서 이십 분, 택시로 오 분. 늘 걸어갔다. 오늘 지훈이 택시를 잡았다.
"걸어가."
"택시."
"추워?"
"타."
소연은 탔다. 뒷자리 왼쪽. 지훈이 오른쪽. 택시 뒷자리는 팔십 센티미터가 안 됐다. 사십 센티미터. 그녀는 창문 쪽으로 몸을 붙였다. 지훈은 정면을 봤다.
"정산이 뭐야."
소연이 물었다. 창밖을 보면서.
"일곱 개."
"그러니까 일곱 개 뭐."
"몰라."
"몰라?"
"아직 안 정했어."
"강지훈, 너 벌칙 정하지도 않고 세고 있었어?"
"응."
"그럼 왜 세."
"세는 게 좋아서."
택시 기사가 라디오 볼륨을 조금 올렸다. 소연은 지훈을 봤다. 그는 아직 정면을 보고 있었다. 가로등이 지나갈 때마다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 안경에 불빛이 스쳤다.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야?"
"아니."
"그럼 뭐야."
"참고 있는 거."
"뭘."
지훈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를 봤다. 삼 년 동안 봐온 얼굴이었다. 그런데 이 각도로는 처음이었다. 사십 센티미터. 술 때문에 조금 풀린 눈. 그녀는 그 눈을 보고 알았다. 하영이 말한 '나머지 이 초'가 뭐였는지.
"이소연."
"응."
"여덟."
"아무것도 안 했어."
"그 얼굴."
그가 그녀에게 키스했다.
택시 뒷자리에서. 한쪽 손으로 그녀의 뒷목을 잡고. 소주 맛이 났고, 마늘 맛이 조금 났고, 그 밑에 그냥 그의 맛이 났다. 소연은 삼 초 동안 아무것도 못 했다. 그리고 사 초째에 그의 옷깃을 잡았다. 밀어내려고 잡은 게 아니었다. 그냥 뭔가를 잡아야 했다.
그가 입술을 뗐다. 아주 조금만. 이마가 맞닿을 거리.
"이건 벌칙이야, 보상이야?"
소연이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그건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네가 정해."
지훈이 말했다. 그리고 다시 정면을 봤다. 택시가 원룸촌 입구에 멈췄다. 그녀의 건물이 먼저였다. 그가 카드를 찍었다.
"내려."
"너는."
"나는 걸어갈게. 여기서 삼 분이야."
"택시 탄 이유가 뭐야 그럼."
"걸어가면 이십 분이잖아. 이십 분 동안 참을 자신이 없었어."
소연은 내렸다. 문을 닫았다. 택시는 가지 않았다. 지훈이 내렸다. 기사가 뭐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그는 손을 들어 인사하고 걸어갔다. 반대 방향으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소연은 원룸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일 분. 오 분. 십 분. 비밀번호를 세 번 틀렸다. 손가락이 자기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입술은 아직 그의 온도였다. 그녀는 그걸 정리해보려고 했다. 데이터를 정리하듯이. 변수를 정의하고, 규칙을 세우고, 열을 나누고.
안 됐다.
'네가 정해.'
그게 제일 안 됐다. 그는 늘 정하는 사람이었다. 마감을 정하고, 벌칙을 정하고, 파일명 규칙을 정하고. 그런데 지금 그걸 그녀에게 넘겼다. 그 말이 어떤 벌칙보다도 그녀를 꼼짝 못하게 했다.
폰이 울렸다. 지훈.
'들어갔어?'
'아직.'
'왜.'
'비밀번호 까먹었어.'
'0611.'
그녀의 생일이었다. 그가 그걸 어떻게 아는지 그녀는 물어보지 않았다. 문이 열렸다. 그녀는 계단을 올라가면서 답장을 쳤다.
'벌칙으로 할게.'
'뭘.'
'그거. 아까 그거. 벌칙으로 정할게. 그래야 또 받을 수 있으니까.'
답장은 한참 뒤에 왔다. 그녀가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보고 있을 때.
'그럼 아직 일곱 개 남았어.'
그녀는 폰을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폰을 밀어 올렸다. 그건 그녀가 정리할 수 없는 데이터였다. 처음으로 그게 싫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