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보드 우측 하단, 누적 일곱
연구실 화이트보드는 원래 세미나 일정을 적는 용도였다. 왼쪽 위에 이번 주 발표자, 그 아래 장비 예약, 그 아래 교수님 출장 일정. 그런데 어느 날부터 우측 하단 구석에 작은 표 하나가 생겼다.
'소연 벌칙 누적: 7'
누가 그렸는지는 명확했다. 필체가 지훈이었다. 자를 대고 그린 것처럼 반듯한 표. 그리고 그 옆에 다른 필체로 덧붙여진 낙서. '지훈 벌칙 창의성: 2/10'. 이건 소연이었다.
"이거 누가 지우면 어떡해."
민재가 물었다. 지훈은 보드마카 뚜껑을 닫으면서 대답했다.
"안 지워. 다들 알아."
정말로 다들 알았다. 포닥 형이 세미나 일정을 적을 때도 그 구석은 정확히 피해서 적었다. 유나가 장비 예약을 적을 때도 그랬다. 그 표는 이 연구실의 지형에 편입되었다. 마치 오래된 얼룩처럼. 마치 창문 옆 죽은 화분처럼.
숫자는 매주 올라갔다.
소연의 방식은 진화하고 있었다. 마감을 어기는 건 이제 기본기였다. 그 위에 응용이 붙었다. 지훈의 공유 폴더 안 파일명들이 어느 날 전부 바뀌어 있었다. 'model_v2.py'는 'model_v2_지훈이가짠거_돌아가긴함.py'가 되었고, 'results_final.csv'는 'results_final_아님_속았지.csv'가 되었다. 지훈은 삼십 분 동안 그걸 하나하나 되돌렸다. 되돌리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 되돌린 뒤에 보드마카를 들고 일어났다. 7이 8이 되었다.
"벌칙."
"뭔데."
"이번 주 랩미팅 회의록. 손글씨로."
"손글씨? 지금이 조선시대야?"
"손글씨로. A4 두 장 이상."
소연은 정말로 손으로 썼다. 두 장 반. 글씨는 형편없었지만 내용은 완벽했다. 그리고 마지막 줄에 '이상, 회의록 작성자 이소연. 강지훈이 시켰음. 인권위에 제보 예정.'이라고 적었다. 지훈은 그 회의록을 공유 폴더에 스캔해서 올렸다. 마지막 줄까지 전부.
지훈의 방식도 진화하고 있었다. 그는 벌칙을 짤 때 이상하게 진지해졌다. 커피 사기는 첫 학기에 졸업했고, 세미나 간식도 이제는 식상했다. 그는 소연이 싫어하는 걸 정확히 알았다. 그녀는 반복 작업을 싫어했고, 정적을 싫어했고, 자기가 잘하는 걸 못한다고 취급받는 걸 싫어했다. 그래서 그는 그 세 가지를 절대 벌칙에 넣지 않았다. 그가 넣는 건 다른 거였다. 소연이 하기 싫어하면서도 사실은 잘하는 것. 손글씨 회의록. 교수님 학부 강의 채점 대타. 신입생 장비 교육.
"너 벌칙이 이상해."
어느 날 소연이 말했다. 두 사람만 남은 연구실, 밤 아홉 시.
"뭐가."
"벌칙인데 내가 욕을 안 하게 돼."
"욕 많이 하잖아."
"입으로는 하는데 속으로는 안 해. 그게 이상하다는 거야."
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모니터만 봤다. 소연은 그 침묵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의자를 밀고 그의 자리로 갔다. 그의 모니터에는 코드가 떠 있었다. 새 전처리 스크립트. 그녀가 지난주에 라벨링한 데이터를 자동으로 읽어들이는 코드였다.
"이거 뭐야."
"네 작업 자동화."
"뭐?"
"라벨링 규칙 보니까 패턴이 있어서. 이거 돌리면 네가 하는 거 절반은 자동으로 돼."
소연은 화면을 봤다. 정말이었다. 그녀가 삼 년 동안 손으로 해온 규칙이 함수 열두 개로 정리되어 있었다. 변수명까지 그녀가 엑셀에 쓰던 열 이름 그대로였다. 이 인간은 그녀의 엑셀을 얼마나 오래 들여다본 걸까.
"그럼 나 이제 벌칙 받을 일 없겠네."
"그런가."
"마감 어길 데이터가 없으니까."
"그렇네."
두 사람 사이에 이상한 공기가 흘렀다. 소연은 그게 뭔지 몰라서 손을 뻗었다. 그의 키보드로. 저장 안 된 스크립트 창에서 컨트롤 A를 누를 생각이었다. 그다음에 딜리트. 그냥 장난이었다. 그가 화내는 걸 보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뭔가를 하는 걸 보고 싶었다.
손목이 잡혔다.
뒤에서. 지훈이 의자에서 반쯤 일어난 자세로 그녀의 오른쪽 손목을 잡고 있었다. 손이 컸다. 손목을 한 번에 감쌌다. 뜨뜻했다. 그가 말했다.
"손 떼."
낮게. 그녀의 귀 바로 옆에서. 그 목소리였다. 벌칙이라고 말할 때 나오는 목소리.
소연은 움직이지 않았다. 손을 떼지도 않았고, 뭐라고 대꾸하지도 않았다. 그냥 멈춰 있었다. 손목에 그의 손이 있었고, 뒤에 그의 몸이 있었고, 귀 옆에 그의 숨이 있었다. 삼 년 동안 팔십 센티미터였던 거리가 지금은 영이었다.
지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손을 놔야 한다는 걸 알았다. 이미 그녀는 키보드에서 손가락을 뗀 상태였다. 잡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일 초. 이 초. 그는 삼 초째에 손을 놨다. 일 초 늦었다. 둘 다 그걸 알았다.
"저장 안 했어."
그가 말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갈라졌다.
"알아. 그래서 한 거야."
소연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의자에 앉았다. 모니터를 봤다.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 손목이 아직 뜨거웠다. 그녀는 왼손으로 오른쪽 손목을 감쌌다. 그의 손보다 작았다. 다 감싸지지 않았다.
지훈은 컨트롤 S를 눌렀다. 세 번. 저장은 한 번으로 충분했다.
그날 밤 소연은 원룸 침대에 누워서 대학 동기 하영에게 문자를 보냈다.
'연구실 동기가 내 손목을 잡았어. 내가 지 코드 지우려고 해서.'
'그래서?'
'그래서가 뭐야. 그게 다야.'
'몇 초?'
'……삼 초.'
'그거 플러팅이야 멍청아.'
'아니야. 그냥 코드 지우려고 하니까 잡은 거야.'
'삼 초는 코드 때문이 아니야. 코드는 일 초면 충분해. 나머지 이 초는 뭔데.'
소연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 폰을 뒤집어 놓고 천장을 봤다. 손목을 다시 만져봤다. 이제 뜨겁지 않았다. 그냥 손목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직 거기 뭔가 있는 것 같았다.
같은 시각 지훈은 연구실에 혼자 남아 있었다. 그는 자동화 스크립트를 마저 짰다. 다 짰다. 테스트도 통과했다. 이걸 돌리면 소연의 작업 절반이 사라진다. 마감을 어길 데이터가 절반으로 준다. 벌칙이 절반으로 준다.
그는 커밋 메시지를 쓰다가 손을 멈췄다.
그리고 스크립트 맨 위에 주석을 하나 달았다.
'# TODO: 라벨링 규칙 12번은 자동화 안 됨. 수동 필요. 담당: 이소연.'
12번 규칙은 자동화가 됐다. 그가 오늘 짠 열두 개 함수 중 마지막 함수가 정확히 그거였다. 그는 그 함수를 주석 처리했다.
커밋했다.
화이트보드를 봤다. 8. 그는 그 숫자가 어디까지 올라갈지 처음으로 궁금했다. 그리고 그게 벌칙 때문인지, 아니면 벌칙을 준다는 핑계로 그녀에게 뭔가 말할 이유가 생기는 게 좋아서인지, 그 질문은 오늘도 열지 않고 닫았다.
닫는 게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건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