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다섯 시 오십팔 분
오후 다섯 시 오십팔 분.
강지훈은 모니터 오른쪽 아래 시계를 세 번째로 확인했다.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이 연구실에서 그가 시계를 보는 유일한 이유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인간 때문이었고, 그 인간은 지금 젤리 봉지를 뜯고 있었다.
"이소연."
"응."
"전처리 파일."
"응."
"응이 아니라, 어디 있냐고."
소연은 젤리 하나를 입에 넣고 아주 천천히 씹었다. 복숭아 맛이었다. 지훈이 싫어하는 맛이었다. 그걸 알고 산 거였다.
"정리 중이야."
"여섯 시까지라고 어제 네 입으로 말했잖아."
"내 입으로 말한 거랑 내 손으로 하는 거는 다른 부서야. 부서 간 협의가 좀 늦어지고 있어."
지훈은 안경을 벗고 미간을 눌렀다. 이 연구실에서 서로 마주 앉은 지 삼 년. 석사 첫 학기부터 같은 지도교수, 같은 프로젝트, 같은 실험 장비, 책상 사이 거리 정확히 팔십 센티미터. 한지원 교수님의 뇌신호 데이터 연구실에서 박사과정 동기라는 건 그런 뜻이었다. 남이 몇 시에 화장실 가는지까지 아는 사이. 그리고 남이 마감을 몇 분 남기고 젤리를 까는지까지 아는 사이.
"피험자 열두 명 EEG 채널 라벨링, 아티팩트 구간 마킹, 세션별 CSV. 그거 없으면 내가 내일 아침에 모델 못 돌려."
"알아."
"아는데 왜 안 해?"
소연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반짝였다. 지훈은 그 눈빛을 알고 있었다. 삼 년 동안 매일 봤으니까. 실험이 재미있어서 반짝이는 게 아니었다. 자기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걸 정확히 알고 있을 때 나오는 눈빛이었다.
"하기 싫어서."
시계가 여섯 시로 넘어갔다.
"벌칙."
지훈이 말했다. 낮게, 짧게,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서.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소연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는 걸 지훈은 보지 못했다. 그는 안경을 다시 쓰고 있었다.
"뭔데."
"내일 세미나 간식 네가 사."
"그게 다야?"
"그게 다야."
소연은 젤리 봉지를 접었다. 표정이 어딘가 실망스러웠다. 지훈은 그 표정의 의미를 몰랐다. 소연도 사실 잘 몰랐다.
"너 벌칙 진짜 못 짜. 창의성이 없어. 이러니까 논문 리뷰어가 매번 노벨티 부족이라고 하지."
"그 리뷰어가 너였잖아. 내부 리뷰."
"어쨌든."
연구실 구석에서 누군가 킥킥 웃었다. 석사 2년차 민재였다. 민재는 이 연구실에 들어온 지 일 년 반 만에 두 선배의 대화를 테니스 경기처럼 관람하는 법을 익혔다.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서. 가끔 점수를 매기면서.
"민재."
"네, 선배."
"뭘 웃어."
"아니요. 근데 저, 소연 선배 벌칙 이번 달에 몇 번째예요? 제가 세어봤는데 일곱 번 같은데."
"세지 마."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민재는 다시 자기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입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벌칙이라는 게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소연은 기억했다. 석사 1학기, 첫 랩미팅에 소연이 이십 분 늦었을 때였다. 지훈은 그때부터 이미 안경을 쓰고 미간을 누르는 인간이었다. 미팅이 끝나고 지훈이 말했다. "다음부터 늦으면 커피 사." 소연은 그 말투가 마음에 안 들어서 대답했다. "알겠어. 그럼 다음에도 늦을게."
그리고 정말 늦었다. 커피를 샀다. 지훈은 커피를 받으면서 아주 미세하게 웃었다. 소연은 그 웃음이 더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서 또 늦었다.
삼 년이었다.
"그래서 파일은."
"지금 해."
소연은 마우스를 잡았다. 모니터에 엑셀 창이 떴다. 열두 개의 탭. 이미 라벨링은 끝나 있었다. 아티팩트 마킹도 끝나 있었다. 사실 어제 새벽 두 시에 끝내놓은 거였다. 그녀는 파일명을 바꿨다. 'EEG_preprocessed_v3.csv'를 'EEG_preprocessed_v3_진짜최종_지훈아미안.csv'로.
공유 폴더에 올렸다.
지훈의 모니터에 알림이 떴다. 그는 파일명을 읽었다. 한 번. 두 번.
"이소연."
"응."
"파일명."
"그게 진짜 최종이라는 뜻이야."
"미안이라는 건."
"그건 그냥 붙인 거야. 의미 없어."
지훈은 파일을 열었다. 완벽했다. 채널 라벨 정확, 아티팩트 구간 표시 정확, 세션 구분 정확, 심지어 그가 요청하지도 않은 피험자별 임피던스 노트까지 마지막 열에 붙어 있었다. 이 인간은 이걸 언제 했을까. 그는 소연이 오늘 하루 종일 뭘 했는지 떠올려 봤다. 논문 두 편 읽고, 커피 세 잔 마시고, 민재 코드 봐주고, 젤리 먹고.
그러니까 어제 밤에 이미 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안 낸 거였다. 여섯 시가 되기를 기다리면서.
"야."
"응."
지훈은 뭔가를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간식 복숭아 젤리 사 오면 벌칙 두 배."
"알겠어. 복숭아 젤리 두 봉지."
"이소연."
"강지훈."
민재가 다시 킥킥 웃었다. 이번엔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여덟 시. 소연이 가방을 챙겼다. 지훈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는 항상 남아 있었다. 그녀는 문 앞에서 돌아섰다.
"너 몇 시에 가."
"모델 돌려놓고."
"그거 내일 아침에 돌린다고 했잖아."
"네가 냈으니까 오늘 돌리지."
소연은 뭔가 대꾸하려다가 말았다. 그냥 나갔다. 복도를 걸어가면서 그녀는 이상한 걸 느꼈다. 지훈이 '벌칙'이라고 말했을 때, 그 낮은 목소리가 아직 귀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삼 년 동안 백 번은 들은 말이었다. 오늘 새로 들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귀가 뜨겁지.
밖에 나오니 바람이 찼다. 그녀는 귀를 만져봤다. 그냥 추워서 그런 거였다. 그렇게 정리했다. 정리는 그녀가 잘하는 거였다. 데이터도, 감정도.
연구실에서 지훈은 모델 학습 로그가 올라가는 걸 보고 있었다. 에폭 하나에 사 분. 스무 에폭. 그는 기다리는 동안 소연이 올린 파일을 한 번 더 열었다. 마지막 열의 임피던스 노트를 읽었다. 피험자 7번 옆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7번 전극 접촉 불량. 내가 세 번 다시 붙였음. 지훈이는 그날 늦게 옴. 벌칙 대상.'
그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다가 자기가 웃고 있다는 걸 깨닫고 그만두었다.
모니터 시계를 봤다. 여덟 시 십이 분. 그는 이 시간에 시계를 볼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자기가 매일 다섯 시 오십팔 분에 시계를 보는 이유가 정말로 마감 때문인지.
에폭이 하나 더 넘어갔다.
그는 그 질문을 저장하지 않고 닫았다. 정리는 그가 잘하는 거였다. 데이터도, 감정도.
그렇다고 둘 다 믿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