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을 읽는 사람
자유로는 비어 있었다.
토요일 오전 열 시. 한강 오른편으로 철책이 이어졌다. 유라는 철책을 볼 때마다 저 너머가 강이라는 사실을 잊었다. 강은 보이지 않았고 철망만 보였다. 시속 구십 킬로미터로 달리면서 그녀는 자신을 반대신문했다. 증인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증인은 상대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증인은 이 행동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까.
답을 하지 않았다. 답을 하지 않는 것은 처음이었다.
주소는 탄현면이었다. 헤이리에서 십 분쯤 더 들어간 곳. 이차선 도로 옆에 조립식 창고 같은 건물이 있었고 간판은 없었다. 대신 문 옆에 나무 판이 하나 걸려 있었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그냥 판. 결이 곧고 색이 깊었다.
문은 열려 있었다. 안에서 소리가 났다. 유라는 그 소리를 알지 못했다. 쇠가 나무를 얇게 벗겨 내는 소리. 일정한 간격으로, 길게.
"들어오세요. 잠깐만 앉아 계세요. 이 면을 끝내야 해서."
여자는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작업대 앞에 서서 대패를 밀고 있었다. 짧은 머리에 흰 새치가 섞여 있었고, 소매를 걷은 팔뚝은 마른 나무 색이었다. 가죽 앞치마. 대패가 지나갈 때마다 얇은 나무가 말려 올라와 바닥에 떨어졌다.
유라는 문 옆 의자에 앉았다. 기다리는 것은 그녀에게 낯선 일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보통 다른 일을 했다. 메일을 읽거나 문장을 만들거나. 그런데 이 공간에서는 휴대폰을 꺼내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냥 보았다.
여자는 대패를 밀고, 멈추고, 판의 표면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눈을 감고 쓸었다. 그리고 다시 대패를 밀었다. 방향이 조금 바뀌었다. 유라는 그것을 보고 있었다. 손바닥이 뭔가를 읽고, 대패가 그것을 따라가는 것을.
십오 분쯤 지났을 때 여자는 대패를 내려놓았다.
"현정이에요. 커피 드릴게요."
공방 안쪽에 작은 부엌이 있었다. 난로가 있었고 아직 불은 없었다. 현정은 주전자를 올리고 드립으로 커피를 내렸다. 유라는 그 사이에 공방을 보았다. 벽에 걸린 끌들. 크기 순서대로. 한쪽에 세워 둔 판재들. 종이 딱지가 붙어 있었다. 날짜와 나무 이름. 호두, 물푸레, 참나무. 어떤 딱지의 날짜는 사 년 전이었다.
"말리는 중이에요." 현정이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저건 내년 봄쯤 쓸 수 있어요."
"사 년을요?"
"급하게 말리면 갈라져요. 겉은 마르고 속은 안 말라서."
현정은 작업대 옆 의자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 작업대 모서리가 있었다. 현정은 앞치마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과 연필을 꺼냈다.
"적어도 될까요. 저는 기억을 못 믿어서요."
"네."
"뭘 원하세요."
유라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뜨거웠다.
"조용해지는 거요."
현정은 연필을 움직이지 않았다. 유라가 이어서 말하기를 기다렸다. 유라는 법정에서 침묵을 무기로 쓰는 법을 알았다. 그런데 이 침묵은 무기가 아니었다. 그냥 자리였다. 말이 들어갈 자리.
"머릿속에서 문장이 안 멈춰요. 십 년쯤 됐어요. 한 번, 딱 한 번 멈춘 적이 있는데, 그게 맞았을 때였어요. 세게도 아니었어요. 그냥 손바닥으로. 삼 초쯤 조용했어요."
현정은 그제야 적었다. 짧게.
"그다음은 없었어요?"
"없었어요. 부탁할 수 없었어요."
"왜요."
"제가 그런 걸 원하는 사람이라는 걸, 저도 몰랐으니까요. 알고 나서는, 말할 사람이 없었고요."
현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판단이 없는 끄덕임이었다.
"원하지 않는 건요."
"흔적이요. 보이는 데는 안 돼요. 정장을 입으니까 무릎 위는 괜찮은데, 허벅지는… 아니요. 엉덩이만. 그리고 도구는 아직."
"손만."
"손만요."
"말은요. 어떤 말이 싫으세요."
유라는 잠깐 생각했다. 이런 질문을 받을 줄 몰랐다.
"'잘못했다'는 말이요. 제가 뭘 잘못해서 맞는 거라는 식으로는… 하고 싶지 않아요. 그건 이미 매일 하고 있으니까."
현정은 연필을 멈추고 유라를 보았다.
"유라 씨는 잘못한 게 없어요."
그냥 그렇게 말했다. 사실을 말하듯. 유라는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커피잔을 들었다. 현정은 보지 않은 척 수첩으로 눈을 돌렸다.
"제 쪽 얘기를 할게요." 현정이 말했다. "저는 세기를 미리 정하지 않아요. 몸이 말하는 세기를 읽어요. 그래서 처음엔 느려요. 답답할 수도 있어요. 대신 결을 거스르진 않아요. 거스르면 뜯기니까."
"나무처럼요."
"나무처럼요."
"그리고 첫날엔 그것만 해요. 다른 건 없어요. 손바닥이 뭘 하는지 먼저 알아야 하니까요. 유라 씨도, 저도."
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인지 실망인지 알 수 없는 것이 가슴에 내려앉았다.
"멈추는 말을 정해요." 현정이 말했다. "유라 씨가 정하세요. 평소에 잘 안 쓰는 말로."
유라는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휴정이요."
현정이 처음으로 웃었다. 입꼬리만 올라가는 웃음이었다.
"법원 말이네요."
"…네."
"직업은 안 물을게요. 그 말이면 됐어요."
현정은 수첩을 덮었다. 그리고 작업대 밑에서 뭔가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나무 조각이었다. 모서리가 둥글게 다듬어져 있었고, 표면은 유리처럼 매끈했다.
"호두나무예요. 오늘 다듬은 판에서 나온 자투리. 이번 주에 이걸 갖고 다니세요. 만지고 싶을 때 만져요. 손이 뭘 원하는지, 그걸 알아 두면 좋아요."
유라는 나무를 받았다. 따뜻했다. 현정의 손에 있던 온기였다.
"다음 주 토요일, 같은 시간이요." 현정이 말했다. "오기 전에 마음이 바뀌면 그냥 안 오셔도 돼요. 연락 안 해도 돼요. 저는 어차피 여기 있으니까."
돌아가는 자유로에서 유라는 나무 조각을 왼손에 쥐고 있었다. 오른손으로만 운전했다. 철책 너머로 강이 있다는 것을 이번에는 잊지 않았다. 보이지 않아도 있는 것들이 있었다.
주머니 속 나무는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식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