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음

새벽 두 시 사십 분이었다.

유라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왼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계약서 초안은 마흔두 페이지였고, 그중 열일곱 페이지에 상대측 로펌이 붉은 표시를 남겨 두었다. 열일곱 개의 반론이 머릿속에서 동시에 말을 시작했다. 진술보증 조항의 예외 범위, 손해배상 상한, 클로징 선행 조건. 그 밑으로 다른 목소리들이 겹쳤다. 내일 아침 아홉 시 회의에서 파트너가 물어볼 질문. 그 질문에 대한 답. 그 답에 대한 재반박. 어머니가 지난주 전화에서 한 말. "올해가 파트너 심사지?" 지수가 삼 년 전 현관에서 한 말.

그것이 유라가 아는 소음이었다. 소리가 아니었다. 소리라면 귀를 막으면 됐다. 이것은 멈추지 않는 문장이었다. 하나가 끝나기 전에 다음이 시작되고, 다음이 끝나기 전에 그 다음이 시작되는.

서른다섯이었다. 서초동 대형 로펌의 시니어 어쏘시에이트. 주 팔십 시간을 일하고, 밤에는 역삼동 오피스텔에서 세 시간을 잤다. 잠드는 데 한 시간이 걸렸고 잠든 뒤에도 소음은 이어졌다. 꿈속에서 그녀는 자신을 반대신문했다.

약을 먹어 봤다. 상담을 받아 봤다. 상담사는 좋은 사람이었고, 유라는 그 사람 앞에서도 정확한 문장으로 말했다. 달리기를 해 봤고, 와인을 마셔 봤고, 명상 앱을 깔았다가 지웠다. 어느 것도 문장을 멈추지 못했다.

멈춘 적은 한 번 있었다.

삼 년 전이었다. 지수와 함께 살던 때. 소파에 앉아 판례를 읽는 그녀의 허벅지를 지수가 장난으로 철썩 때렸다. "좀 쉬어." 그렇게 말하면서. 세지 않았다. 아프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삼 초쯤, 머릿속이 텅 비었다. 문장이 없었다. 허벅지에 남은 손바닥 모양의 열기만 있었다.

유라는 그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수도 잊었을 것이다. 지수는 반 년 뒤에 떠났다. "너는 나를 변호하듯 사랑해." 현관에서 그렇게 말했다. 유라는 그 문장을 지금도 반박하지 못한다. 반박할 수 없다는 사실이 소음의 일부가 되었다.

그 삼 초를 유라는 잊지 않았다.

노트북의 다른 창에는 북마크 폴더가 있었다. 이름은 '기타'였다. 폴더 안에는 이 년 동안 새벽에 읽은 것들이 있었다. 스팽킹이라는 단어를 처음 검색한 날, 그녀는 자기 이름이 검색 기록에 남는 것처럼 브라우저를 닫았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에 다시 열었다.

읽으면서 알게 된 것들이 있었다. 그것이 벌이 아닐 수 있다는 것. 아픈 것이 목적이 아닐 수 있다는 것.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내려놓는 일'이라고 불렀다. 어떤 사람은 '머릿속의 라디오를 끄는 일'이라고 썼다. 그 문장을 읽고 유라는 화면을 한참 보았다.

커뮤니티 계정은 일 년 전에 만들었다. 글은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읽기만 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욕구를 정확한 단어로 말하는 것을, 상대를 찾는 것을, 만나서 있었던 일을 담담하게 적는 것을 읽었다. 유라는 법정에서 남의 욕구를 대신 말하는 일을 십 년 했다. 자기 것은 한 번도 말해 본 적이 없었다.

새벽 세 시 십 분. 계약서 초안을 저장했다. 다른 창을 열었다.

글쓰기 버튼 앞에서 오래 앉아 있었다. 문장을 만드는 것은 그녀의 직업이었다. 그런데 이 문장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한 시간 동안 썼다 지웠다. 마침내 남은 것은 세 줄이었다.

'머릿속이 조용해지는 방법을 압니다. 손바닥으로 맞는 것입니다. 이걸 인정하는 데 서른다섯 해가 걸렸습니다.'

그 아래에 몇 줄을 더 썼다. 서울에 산다는 것. 직업은 밝히지 않는다는 것. 도구 말고 손이면 좋겠다는 것. 급하지 않다는 것. 마지막 문장은 쓰고 나서 지우려다 두었다. '세게 해 줄 사람이 아니라 정확하게 해 줄 사람을 찾습니다.'

등록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노트북을 닫았다.

그날 밤 유라는 두 시간 반을 잤다. 평소보다 삼십 분 적었다. 그런데 눈을 떴을 때, 잠들기 직전의 몇 분이 이상하게 조용했다는 것이 기억났다.

이틀 동안 댓글이 여섯 개 달렸다. 넷은 읽자마자 닫았다. 하나는 정중했지만 남자였다. 유라는 글에 그것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자신이 여자를 원한다는 것을 글에조차 쓰지 못했다는 것을.

여섯 번째 댓글은 사흘째 밤에 달렸다. 아이디는 '결'이었다. 세 문장이었다.

'저는 파주에서 나무를 다룹니다. 세게 치는 것보다 정확히 치는 것에 관심이 있어요. 급하지 않으시다니, 그럼 먼저 커피를 마시죠.'

프로필을 열었다. 여자였다. 사십 대. 가입한 지 육 년. 글은 많지 않았고, 대부분 짧았다. 한 글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무는 결을 거스르면 뜯깁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저는 결을 읽는 시간이 때리는 시간보다 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라는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답장을 썼다. 이번에는 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토요일에 갈 수 있습니다. 파주 어디인지 알려 주세요.'

보내고 나서 그녀는 창밖을 보았다. 역삼동의 새벽은 여전히 밝았고 여전히 시끄러웠다. 머릿속의 문장들도 여전히 이어졌다. 그런데 그 문장들 사이에 처음으로 작은 틈이 하나 생긴 것 같았다. 손바닥 하나가 들어갈 만한 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