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크인은 씬 끝나고만 하는 게 아니래
싸운 건 아니었다. 그게 더 이상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정훈은 야근을 했다. 진짜 야근인지 정훈 회사에 전화해볼 수도 없고. 집에 오면 열한 시였고 샤워하고 누우면 자정이었다. 민아는 자는 척했고 정훈은 자는 척하는 민아 옆에서 진짜로 안 잤다. 참치만 둘 사이에서 잘 잤다.
목요일 밤, 민아는 워크숍 노트를 꺼냈다.
편집자 습관으로 노트를 꼼꼼히 썼다. 레이가 한 말을 거의 받아 적었다. 스팽킹 그림 옆에 별표. 안전어 페이지에 '파인애플 (정훈 반대)'.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
'4. 체크인.
씬이 끝난 뒤에만 하는 게 아니다. 관계 전체에 필요하다.
형식: ① 뭐가 좋았어? ② 뭐가 불편했어? ③ 다음엔?
규칙: 판단하지 않고 듣기. 변명하지 않고 말하기. 끝까지.'
민아는 그 밑에 자기가 써놓은 걸 봤다. '이건 안 해도 될 듯. 우린 12년 차.'
노트를 덮었다. 다시 폈다. 그 줄을 볼펜으로 그었다.
금요일 밤. 정훈이 열 시에 왔다. 평소보다 빨랐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는데 식탁에 민아가 앉아 있었다. 맥주 두 캔. 노트 한 권. 참치는 식탁 위에서 노트 위에 앉아 있었다.
"뭐야."
"앉아."
정훈이 앉았다. 반사적으로. 그리고 자기가 앉은 걸 알아채고 조금 불편한 얼굴을 했다.
"체크인 하자."
"뭐?"
"워크숍 숙제 4번. 안 했잖아. 1번 2번 3번은 했는데."
정훈이 노트를 봤다. 참치가 노트 위에서 안 비켜줬다.
"형식이 있어. 뭐가 좋았어, 뭐가 불편했어, 다음엔. 순서대로. 판단 안 하고 듣기. 변명 안 하고 말하기. 끝까지."
"...너 이거 진짜로 할 거야."
"응. 나 먼저."
민아가 맥주를 땄다. 한 모금.
"뭐가 좋았냐면. 네가 나 보는 눈. 밑에서 올려다볼 때. 안대 벗겼을 때 '봤다' 했잖아. 그 눈. 12년 동안 내가 그 눈으로 널 봤겠구나 싶었어. 그걸 네가 알았으면 했어."
정훈이 맥주캔을 만졌다. 따지 않았다.
"그리고 네가 40분 엎드려 있었던 거. 아무도 안 보는데. 그거 생각하면 아직도 이상해. 좋은 쪽으로."
"...응."
"뭐가 불편했냐면." 민아가 노트를 봤다. 안 봐도 알았다. "지난주. 네가 없었어. 위에 있는데 없었어. 그리고 이유를 말 안 해줘서. 그게 제일 불편했어. 네가 없는 거보다 왜 없는지 모르는 게."
정훈이 캔을 땄다. 절반을 마셨다.
"다음엔은 네 얘기 듣고."
민아가 캔을 내려놨다. "네 차례."
정훈은 오래 걸렸다.
맥주를 다 마셨다. 캔을 찌그러뜨렸다. 참치를 노트에서 내려놓으려다 참치가 안 내려가서 포기했다. 식탁 나뭇결을 손톱으로 긁었다. 민아는 기다렸다. 판단하지 않고. 그게 제일 어려웠다.
"너무 좋았어."
민아는 뭐라고 하려다 참았다. 끝까지.
"뭐가 좋았냐면. 다. 묶인 거. 안대. 맞은 거. 네가 시키는 거. 40분 엎드려 있는 거." 정훈이 캔을 굴렸다. "특히 자로 맞을 때. 그때 아무 생각도 안 났어. 회사도 배포도 부장도 엄마도. 그냥 엎드려서 맞는 거밖에 없었어. 그게—"
정훈이 멈췄다.
"그게 태어나서 제일 편했어."
민아는 아무 말도 안 했다.
"그게 불편한 거야. 좋았던 게. 12년 동안 내가 리드하는 게 나라고 생각했거든. 남편이고. 위고. 널 챙기고. 회사에서도 그렇고 시댁에서도 장남이고. 근데 네 밑에 있을 때 제일 편했어. 생각을 안 해도 됐어. 그래서 무서웠어. 나 원래 그런 사람이었나. 그럼 지금까지 12년은 뭐였나. 내가 널 리드한 게 아니라 그냥 그래야 되니까 한 건가."
"정훈아."
"끝까지."
민아가 입을 다물었다.
"그날 밤. 자로 맞고 나서. 나 울었어. 네가 못 봤을 거야. 불 꺼서. 너무 좋아서 울었는데, 그게 남자로서 창피했어. 마흔한 살에 마누라한테 자로 맞고 울었다는 게. 그래서 원래대로 하면 돌아갈 줄 알았어. 근데 위에 있으면서 계속 밑을 생각했어. 네가 노랑이라고 했을 때 솔직히 고마웠어. 그게 끝이야."
정훈이 캔을 놨다.
"다음엔은 모르겠어."
민아는 잠깐 앉아 있었다. 판단하지 않고. 근데 이제 말할 차례였다.
"그럼 난?"
"뭐가."
"12년 동안 밑에 있었으면 난 원래 밑인 사람이야? 근데 위도 좋았는데? 그럼 12년은 뭐였어?"
정훈이 민아를 봤다.
"둘 다 되는 거 아니야? 레이가 그랬잖아. 스위치. 위도 되고 밑도 되는 사람. 그게 이상한 게 아니라 그냥 그런 사람이라고."
"...그래도 남자가—"
"오이."
정훈이 멈췄다.
"뭐?"
"그 문장 정지. 빨강."
정훈이 민아를 봤다. 민아도 정훈을 봤다. 정훈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아주 조금.
"너 그거 이렇게 쓰는 거 아니야."
"안전어는 내가 정해."
"내가 정했잖아. 오이는."
"그럼 오이는 네가 정했고 언제 쓸지는 내가 정해."
정훈이 웃었다. 일주일 만에. 코로 바람을 내뿜는 정도였는데 그게 웃음이었다.
"그리고." 민아가 말했다. "나 첫날밤에 울었어. 12년 전에. 너 몰랐지."
"...몰랐어."
"화장실 가서 울었어. 너무 좋아서. 근데 그거 말하면 이상하게 볼까 봐 안 했어. 봐. 12년 동안 몰랐던 거 하나씩 있네."
정훈이 식탁 위로 손을 뻗었다. 민아 손을 잡았다. 참치가 그 손 위에 앞발을 얹었다.
"다음엔." 민아가 말했다. "오늘 뭐 하고 싶어. 네가 골라. 판단 안 해."
정훈이 생각했다. 진짜로.
"...네가 해줘. 근데 천천히."
"천천히."
"묶지 말고. 안대도 말고. 그냥 네가 위에서. 내가 보게."
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 불을 켜놨다. 정훈이 그러자고 했다. 보고 싶다고.
민아가 정훈 옷을 벗겼다. 셔츠 단추를 하나씩. 정훈은 가만히 있었다. 시켜서가 아니라 그냥 가만히. 민아가 벗기는 걸 봤다. 바지. 팬티. 정훈은 벌써 반쯤 서 있었다. 민아가 그걸 손으로 감쌌다. 천천히. 정훈이 숨을 내쉬었다.
"이거 좋아." 정훈이 말했다. "네가 보는 거. 네가 날 보면서 만지는 거."
"알아."
"어떻게 알아."
"12년 동안 네가 날 그렇게 봤으니까."
민아가 옷을 벗었다. 정훈 앞에서. 정훈이 봤다. 이번엔 안대 없이 다 봤다. 민아 가슴, 배, 허벅지. 정훈이 손을 들었다가 멈췄다.
"만져도 돼?"
"오늘은 돼."
정훈 손이 민아 허리에 닿았다. 따뜻했다. 늘 그랬다. 민아가 정훈 위에 올라갔다. 정훈 자지를 잡고 자기 보지에 댔다. 젖어 있었다. 대화하는 동안 젖어 있었다는 걸 민아는 그때 알았다. 판단 안 하고 듣는 게 이렇게 되는 건지 몰랐다.
천천히 앉았다.
정훈 눈이 민아 눈에서 안 떨어졌다. 끝까지 들어갔을 때 정훈이 소리를 냈다. 민아도 냈다. 근데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있었다. 정훈 손이 민아 허리에서 등으로 올라왔다. 민아가 몸을 숙여서 정훈 얼굴 위에 얼굴을 뒀다.
"좋아?"
"응."
"뭐가."
"...네가 위에 있는데 날 보는 거. 내가 밑에 있는데 무섭지 않은 거."
민아가 움직였다. 천천히. 위아래가 아니라 앞뒤로. 정훈 자지가 안에서 각도를 바꿨다. 정훈이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보려고.
"더." 민아가 말했다.
"뭘."
"밀어. 밑에서."
정훈이 허리를 들었다. 민아가 내려올 때 밀어 올렸다. 둘이 만났다. 민아가 소리를 냈다. 정훈이 또 밀었다. 민아가 시켜서 하는 건데 시키는 것 같지 않았다. 그냥 같이 하는 거였다.
"나 울어도 돼?" 정훈이 물었다.
"울어."
정훈 손이 민아 가슴을 잡았다. 젖꼭지를 엄지로. 늘 하던 대로. 근데 밑에서 올려다보면서. 민아는 정훈 얼굴을 봤다. 눈이 젖어 있었다. 정훈은 안 닦았다. 민아가 정훈 손 하나를 잡아서 자기 클리토리스로 가져갔다.
"여기."
정훈이 문질렀다. 12년 동안 문질렀던 곳. 근데 민아가 손을 잡고 가져다 놓은 건 처음이었다. 정훈 엄지가 정확했다. 민아가 몸을 떨었다.
"싸도 돼." 민아가 먼저 말했다. "네가 먼저."
"너는."
"나도 곧."
정훈이 왔다. 이번엔 온몸이 떨리지 않았다. 대신 정훈이 민아 이름을 계속 불렀다. 민아. 민아. 민아. 우는 소리랑 섞여서. 민아 안에서 뜨겁게 퍼졌다. 정훈 엄지가 안 멈췄다. 민아가 뒤따라 왔다. 정훈 위에서 몸을 접고 정훈 어깨에 이마를 대고. 정훈 자지가 아직 안에 있었다. 둘 다 떨렸다.
한참 뒤에 민아가 옆으로 내려왔다. 정훈이 민아를 안았다. 늘 하던 대로. 근데 정훈 얼굴이 민아 가슴에 있었다. 민아가 정훈 머리를 쓸었다.
"다음엔." 정훈이 민아 가슴에 대고 말했다. "내가 위."
"응."
"근데 네가 원하는 거 말해줘. 너도 12년 동안 말 안 했잖아. 노랑도 없었고. 첫날밤에 운 것도. 그러니까 이번엔 말해. 더 세게든 거기 말고든."
민아는 잠깐 생각했다. 12년. 정훈이 알아서 다 해줬으니까. 눈 감고도 되니까. 말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말할 생각을 안 했다.
"...맞아."
"응."
"말할게."
토요일 아침. 정훈이 먼저 일어났다. 민아가 나와 보니 냉장고에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서랍에서 꺼낸 거. 반으로 접혔던 자국이 남아 있는 거.
'벌칙 목록
정훈: 말대꾸 3회 → 설거지 + 10대
정훈: 웃음 1회 → 분리수거
정훈: '넵' → 자 5대
정훈: 40분 엎드려 있기 → 잘함 (보상: 토요일 원하는 거)'
그리고 맨 밑에 정훈 글씨로 한 줄.
'민아: 말 안 하고 참기 → 10대.'
민아는 그 앞에 한참 서 있었다. 그리고 볼펜을 가져와서 그 밑에 썼다.
'정훈: 일주일 야근 핑계 → 10대. 이자 포함 15대.'
정훈이 뒤에서 그걸 읽고 아무 말도 안 했다. 근데 입꼬리가 올라갔다. 참치가 냉장고 앞에 배를 깔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