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안전어는
석 달 뒤, 냉장고에 포스트잇이 없어졌다.
대신 화이트보드가 붙었다. A4 크기. 정훈이 다이소에서 사 왔다. 왼쪽에 '집안일', 오른쪽에 '벌칙/보상'. 둘 다 썼다. 지우고 다시 썼다. 마카가 세 개 굴러다녔다.
'정훈: 화장실 곰팡이 (완료) → 보상: 토요일 위'
'민아: 택배 안 뜯고 3일 방치 → 10대'
'정훈: 홈쇼핑 앞에서 오이 남발 → 5대 + 안마의자 얘기 금지'
'민아: 말 안 하고 참기 → 이번 달 0회. 잘함.'
'참치: 새벽 4시 우다다 → 벌칙 없음 (고양이라서)'
수진이 두 번 더 왔다. 두 번 다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읽었다. 두 번 다 아무 말 안 했다. 두 번째 갈 때 현관에서 "너네 좋아 보여" 하고 갔다. 그게 다였다. 민아는 그날 밤 수진이 그 말을 하는 데 얼마나 걸렸을까 생각했다.
시어머니는 한 번 왔다.
일요일 점심. 시어머니가 오이소박이를 담가 왔다. 정훈은 오이소박이를 봤다. 민아는 정훈을 봤다. 정훈은 아무 말도 안 했다. 시어머니가 밥을 푸면서 말했다.
"너희 애는 언제."
식탁 밑에서 정훈 손이 민아 무릎을 잡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민아만 들리게.
"오이."
민아가 젓가락을 들었다.
"어머니, 이 오이소박이 진짜 맛있어요. 이거 어떻게 담그세요? 저 배우고 싶어요."
시어머니가 담그는 법을 20분 설명했다. 애 얘기는 안 나왔다. 정훈 손이 민아 무릎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시어머니가 가고 나서 정훈이 설거지하면서 말했다.
"고마워."
"뭐가."
"오이."
"그거 안전어 아니라 구조 요청이었지."
"그것도 안전어야."
민아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오이는 이제 침실에서 안 썼다. 침실은 매번 새로 정했다. 오이는 시댁에서, 회사 회식 얘기 나올 때, 홈쇼핑 앞에서 썼다. 둘 중 하나가 멈춰야 할 때. 그게 워크숍 12만 원의 진짜 결과였는지도 몰랐다.
12주년.
결혼기념일은 목요일이었는데 토요일에 하기로 했다. 토요일이 그날이니까.
정훈 선물은 작은 상자였다. 열어보니 로프. 진짜 로프. 면으로 된 검은색, 두께 6밀리, 10미터. 문구점 리본이 아니었다.
"이거 어디서 샀어."
"인터넷. 검색 많이 했어. 검색 기록 안 지웠어."
"매듭은?"
"유튜브 일곱 번 봤어."
"일곱 번?"
"풀리면 안 되니까."
상자 안에 카드가 있었다. '다음 주 화장실 곰팡이는 내가.' 그게 다였다. 민아는 그게 이 남자 스타일이라는 걸 알았다. 12년.
민아 선물은 노트였다.
출판사 편집자가 만든 노트. 표지는 하드커버 남색. 제목이 박혀 있었다. 금박은 아니고 그냥 흰색 실크 인쇄.
'오늘의 안전어는'
정훈이 펼쳤다.
첫 페이지. '오이. (정훈 반대: 파인애플은 전 세계 사람이 다 씀.) 위: 민아. 웃은 횟수: 정훈 3, 민아 1(넘어진 거). 벌칙: 분리수거.'
다음 페이지. '오이. 위: 민아. 매듭 풀림. 근데 안 움직임. 손바닥에 나무 자국.'
다음. '오이. 위: 민아. 넵 금지. 자 5대. 정훈 40분 엎드림.'
그리고 빈 페이지 하나. 아무것도 안 씀. 정훈이 그 페이지에서 멈췄다.
"이거."
"그 주."
"...응."
정훈이 넘겼다.
'체크인. 위: 민아. 판단 안 함. 정훈 울음. 민아도 첫날밤 얘기 함. 포스트잇 복구.'
'참치. 동전: 학. 위: 정훈 → 민아 → 정훈 → 동시. 옆으로. 12년 만에 제일.'
'종합소득세. 위: 민아. 정훈이 급할 때 "종합—" 하다가 끝남. 웃음 벌칙 면제 (안전어 실패는 벌칙 아님).'
'김치찜. 위: 정훈. 민아가 "더 세게" 7회. 정훈이 "너 진짜 말 많아졌다."'
'사랑니. 위: 정훈. 민아 사랑니 뽑은 다음 날. 아무것도 안 함. 그냥 누워 있음. 이것도 씬.'
'수진이. 위: 민아. 정훈이 "그 이름 들으면 진짜 멈춰" 함. 실제로 멈춤. 두 번.'
석 달. 열두 페이지. 정훈이 한 장 한 장 넘겼다. 자기 손바닥에 나무 자국이 났던 날. 40분 엎드렸던 날. 울었던 날. 민아 글씨로 다 있었다. 판단 없이.
마지막 페이지.
'오늘의 안전어는: ______'
빈칸.
"오늘은?" 정훈이 물었다.
"네가 정해."
정훈이 노트를 봤다. 빈칸을 봤다. 마카를 들었다. 냉장고 마카. 파란색.
썼다.
'오이.'
민아가 봤다.
"오이? 다시?"
"처음 거. 우리가 처음 정한 거. 오늘은 그걸로."
"넌 오이 소리 들으면 굳잖아."
"이젠 안 굳어."
"왜?"
정훈이 마카 뚜껑을 닫았다.
"네가 자꾸 써서. 정들었어."
민아는 노트를 덮었다. 뭔가 말하려다가 말았다. 이 남자가 12년 동안 김밥에서 빼던 걸 석 달 동안 민아가 하도 입에 올려서 정들었다는 말. 그게 이 남자 방식의 고백이라는 걸 민아는 알았다.
"오늘은 동전 없이."
"그럼?"
"네가 시작해. 내가 바꿔 할 때까지."
정훈이 로프를 들었다.
침대. 불 켜놓고. 정훈이 민아 손목을 잡았다. 로프가 감겼다. 두 번, 사이로, 당겨서 고리. 다시 두 번. 다른 방향. 민아가 손목을 움직여봤다. 안 풀렸다. 조이지도 않았다. 딱 맞았다.
"일곱 번 본 거 맞네."
"여덟 번. 아까 화장실에서 한 번 더 봤어."
정훈이 로프 끝을 침대 머리에 묶었다. 민아 팔이 머리 위로 올라갔다. 정훈이 민아 옷을 벗겼다. 손이 묶여 있어서 위는 못 벗기고 아래만. 민아 셔츠가 목까지 밀려 올라갔다. 정훈이 그걸 보고 잠깐 웃었다.
"이건 계획에 없었네."
"닥쳐."
"...네, 민아님."
"지금은 네가 위야."
"아, 맞다."
정훈이 민아 다리를 벌렸다. 입을 댔다. 12년 동안 늘 하던 거. 근데 민아가 손이 묶여 있어서 정훈 머리를 못 잡았다. 그게 이상하게 더 셌다. 잡고 싶은데 못 잡는 거. 정훈 혀가 클리토리스를 눌렀다. 민아 허리가 들렸다. 로프가 당겨졌다. 안 풀렸다.
"말해." 정훈이 민아 다리 사이에서 말했다.
"뭘."
"뭐 원하는지."
"...손가락."
정훈이 손가락을 넣었다. 하나. 민아가 고개를 저었다.
"두 개."
두 개. 안쪽 위. 정훈은 이제 그 자리를 알았다. 민아가 알려줬으니까. 혀는 클리토리스에, 손가락은 안쪽 위에. 민아가 소리를 냈다. 크게. 손목이 로프를 당겼다. 정훈이 안 멈췄다.
"더 세게—"
정훈이 더 세게 했다. 민아가 왔다. 묶인 채로. 허리를 들고 로프를 당기면서. 정훈 입이 젖었다. 정훈이 올라와서 민아 얼굴을 봤다. 웃고 있었다. 자랑스러운 얼굴로.
"바꿔."
정훈이 로프를 풀었다. 30초 걸렸다. 매듭이 제대로 된 매듭이라 푸는 것도 순서가 있었다. 민아가 손목을 돌렸다. 자국이 살짝 남았다. 이번엔 진짜 자국.
"누워."
정훈이 누웠다. 민아가 로프를 들었다.
정훈 손목을 감았다. 두 번. 사이로. 당겨서—
풀렸다.
"...야."
"유튜브 안 봤어?"
"난 리본이었잖아. 이건 굵기가 달라."
"일곱 번 보라니까."
"여덟 번이라며."
민아가 로프를 던졌다. 옷장으로 갔다. 서랍 구석에서 꺼냈다. 남색 줄무늬 넥타이. 12년 전 결혼식. 석 달 전 나비 매듭.
정훈이 그걸 보고 웃었다. 근데 웃긴 웃음이 아니었다.
민아가 넥타이로 정훈 손목을 감았다. 나비 매듭. 석 달 전이랑 똑같이. 정훈이 자기 손목을 봤다.
"선물 포장."
"닥쳐."
"...네."
민아가 정훈 위에 올라갔다. 정훈 자지는 이미 서 있었다. 민아가 잡고 자기 안에 넣었다. 한 번에. 정훈이 소리를 냈다. 민아가 움직였다. 정훈 가슴에 손을 짚고. 넥타이 매듭이 정훈 배 위에서 흔들렸다.
"움직이지 마."
"안 움직여."
"매듭 풀려도."
"...알아."
민아가 속도를 올렸다. 정훈 젖꼭지를 손톱으로. 정훈이 낑낑댔다. 익숙한 소리. 석 달 동안 들은 소리. 12년 동안 못 들었던 소리. 민아가 자기 클리토리스를 문질렀다. 정훈이 봤다. 눈을 못 뗐다. 늘 그랬다.
"싸지 마."
"참고 있어—"
"내가—"
"알아. 네가 말할 때까지."
민아가 왔다. 두 번째. 정훈 위에서. 정훈 자지를 조이면서. 정훈이 이를 악물었다. 민아가 숨을 돌렸다. 정훈 얼굴을 봤다. 벌게진 얼굴. 참는 얼굴. 밑에서 올려다보는 얼굴. 무섭지 않은 얼굴.
"바꿔."
정훈이 말했다. 근데 손이 묶여 있었다.
"어떻게 바꿔. 손이."
"...풀어줘."
"싫어."
정훈이 웃었다. 낑낑거리면서 웃었다.
"그럼 그냥 해."
민아가 그냥 했다. 정훈 손목을 넥타이째로 잡아서 머리 위로 눌렀다. 정훈이 밑에서 밀어 올렸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민아가 뭐라고 안 했다. 같이 했다. 위도 아니고 밑도 아니고. 아니, 위고 밑이고 둘 다.
"지금."
정훈이 왔다. 민아 안에서. 이름을 부르면서. 민아. 민아. 민아. 님 없이. 민아가 그 소리를 들으면서 세 번째로 왔다. 정훈 손목을 누르고 정훈 어깨에 이마를 대고.
한참 뒤에.
민아가 넥타이를 풀었다. 나비 매듭은 풀려 있지 않았다. 석 달 전엔 반쯤 풀렸는데 오늘은 그대로였다. 민아가 그걸 보고 정훈을 봤다.
"안 풀렸네."
"내가 안 움직였으니까."
"움직였잖아. 밑에서."
"손은 안 움직였어."
민아가 넥타이를 침대 머리에 걸었다. 로프는 바닥에. 참치가 로프를 물고 어디론가 갔다. 내일 소파 밑에서 찾을 것이다.
정훈이 노트를 집었다. 마지막 페이지. '오늘의 안전어는: 오이.' 그 밑에 정훈이 썼다.
'위: 둘 다. 웃은 횟수: 4. 벌칙: 없음. 매듭: 정훈 성공, 민아 실패 (넥타이로 대체, 12년 전 것).'
"내일은?" 정훈이 물었다.
"내일 일은 내일 정해."
정훈이 노트를 덮었다. 그리고 시험 삼아, 입에 굴려보듯이, 중얼거렸다.
"오이."
민아가 봤다. 정훈 얼굴을. 굳지 않았다. 그냥 웃었다.
12년 만에.
일요일 아침. 정훈이 김밥을 쌌다. 시어머니가 두고 간 오이소박이가 냉장고에 있었고, 정훈은 그 옆에 있는 오이를 하나 꺼내서 채 썰었다. 민아가 식탁에서 봤다. 아무 말 안 했다. 정훈이 김밥을 말았다. 오이가 들어간 채로.
한 입 먹고 정훈이 얼굴을 찌푸렸다.
"...아직 맛은 없네."
"정든 거랑 맛있는 거는 다르지."
"그러네."
정훈이 그래도 다 먹었다. 민아는 화이트보드에 썼다.
'정훈: 오이 김밥 완식 → 보상: 다음 주 안전어 정하기.'
참치가 냉장고 앞에 배를 깔았다. 뭘 지키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