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어 주실래요?

토요일 오전 열 시, 민아는 안방 문을 잠그고 유튜브를 켰다.

검색창에 뭐라고 쳐야 하는지부터 막혔다. '여성 도미넌트 화법'이라고 쳤더니 영어 강의가 나왔다. '명령하는 말투'라고 쳤더니 군대 브이로그가 나왔다. '여자가 위에서'라고 쳤다가 황급히 지웠다. 결국 '펨돔 대사'까지 쳐서 나온 영상은 대부분 만화였고, 그중에 실사로 된 걸 하나 골라 소리를 죽이고 자막만 봤다.

노트에 적었다. 출판사 편집자답게 줄을 맞춰서.

1. 무릎 꿇어.
2. 내 허락 없인 못 만져.
3. 오늘 넌 내 거야.
4. 잘했어. (칭찬도 중요하다고 함)
5. 색깔?

읽으면서 얼굴이 뜨거워졌다. 남한테 보여주려고 쓴 것도 아닌데. 노트를 덮고 검색 기록을 지우고 시청 기록도 지우고, 혹시 몰라서 유튜브 앱을 껐다 켰다.

소품이 필요했다. 워크숍에서 레이가 그랬다. "처음엔 집에 있는 걸로 하세요. 특별한 도구보다 특별한 태도가 중요합니다." 그 말을 민아는 '돈 쓰지 말라'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집에 있는 것. 정훈의 넥타이. IT 회사 팀장이라 넥타이를 맬 일이 일 년에 두 번인데, 그중 하나가 결혼식 때 맨 남색 줄무늬였다. 옷장 구석에서 꺼내니까 아직 매듭이 남아 있었다. 12년 전 매듭.

빨래집게. 레이가 니플 클램프 대용으로 소개했다. "세기 조절이 안 되니까 아주 살짝, 아니면 옷 위로." 민아는 빨래 건조대에서 나무 집게 두 개를 빼서 손끝을 집어봤다. 아팠다. 옷 위로 하기로 했다.

그리고 냉장고. 정훈이 낮잠 자는 사이에 포스트잇을 하나 더 붙였다.

'벌칙 목록
1. 분리수거
2. 화장실 곰팡이
3. 참치 화장실 모래 갈기'

오후 세 시에 일어난 정훈이 냉장고 앞에 서서 한참 읽었다.

"이거 그냥 내가 미루던 집안일이잖아."

"그러니까 벌이지."

"벌칙이면 좀 더 그런 게 있어야 되는 거 아냐? 뭐, 무릎 꿇고 반성문 쓰기라든가."

"반성문은 4번에 넣을게."

정훈이 뭐라고 하려다가 참치 화장실 앞에서 멈췄다. 모래가 확실히 갈 때가 됐다.

저녁은 대충 먹었다. 둘 다 배부르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12년 부부의 눈치. 정훈이 설거지를 하고, 민아는 안방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검은 슬립. 5년 전 결혼기념일에 사서 한 번 입고 서랍에 넣어둔 것. 입어보니 아직 맞았다. 어깨끈이 얇고 허벅지 중간까지 오는 길이였다. 립스틱을 발랐다. 빨간색. 평소엔 안 바르는 색. 거울을 보니 누구랑 싸우러 가는 사람 같았다.

"다 됐어?" 정훈이 문밖에서 물었다.

"들어와."

정훈은 샤워하고 나온 참이었다. 회색 반바지 하나. 머리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들어와서 민아를 보고, 슬립을 보고, 립스틱을 보고, 잠깐 멈췄다.

"...예쁘네."

"조용히 해."

"네."

"네도 하지 마."

정훈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서 있었다. 민아도 서 있었다. 30초가 지났다. 정훈이 눈으로 물었다. 이제 뭐? 민아는 노트를 봤다. 1번.

심호흡을 했다.

"무릎... 꿇어 주실래요?"

정훈이 터졌다.

"야!"

"네가! 주실래요! 했잖아!" 정훈이 배를 잡았다. "무릎 꿇어 주실래요! 존댓말! 존댓말이 왜 나와!"

"습관이야! 웃지 말라고!"

"못 참아, 이건 못 참아—"

민아가 빨래집게를 던졌다. 정훈 이마에 맞았다. 정훈이 더 웃었다.

"다시. 다시 할게. 진짜로 할 거니까 진지하게 있어."

정훈이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고 입을 꾹 다물었다. 어깨가 아직 떨렸다.

민아는 눈을 감고 목소리를 바닥까지 끌어내렸다.

"꿇어."

너무 낮았다. 동네 아저씨가 주차 시비 붙었을 때 내는 소리였다. 정훈의 얼굴이 벌게졌다. 웃음을 참느라 목에 힘줄이 섰다. 하지만 꿇었다. 무릎이 마룻바닥에 닿는 소리가 났다.

됐다. 됐어. 민아는 노트를 슬쩍 봤다. 2번.

"내 허락 없인 못 만져."

"안 만졌는데."

"미리 말하는 거야."

"알겠어."

"알겠어도 하지 마."

"그럼 뭐라고 해?"

민아는 생각 안 해봤다. 노트에도 없었다. "...그냥 고개 끄덕여."

정훈이 끄덕였다. 진지하게. 그게 또 웃겨서 민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립스틱이 이에 묻었다.

넥타이. 유튜브에서 손목 묶는 매듭을 봤는데 기억이 안 났다. 뭐가 뭘 감고 어디로 빼는지. 민아는 정훈의 손목 두 개를 앞으로 모으고 넥타이를 감았다. 감고, 감고,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나비 모양으로 묶었다.

정훈이 자기 손목을 내려다봤다.

"이거 선물 포장이야?"

"닥쳐."

정훈이 눈을 크게 떴다. 민아도 자기가 한 말에 놀랐다. 12년 동안 이 남자한테 닥치라고 한 적이 없었다. 부부 싸움 할 때도.

"...미안."

"아니." 정훈이 말했다. 웃지 않고. "괜찮아. 계속해."

그 목소리가 좀 달랐다. 민아는 그걸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빨래집게를 주웠다. 정훈이 반바지만 입고 있어서 옷 위로 할 데가 없었다. 민아가 집게를 정훈 가슴 쪽으로 가져갔다. 정훈의 젖꼭지 위에서 집게를 열었다.

"잠깐 잠깐 그건 진짜 아파."

"안전어 써."

"오이! 오이 오이 오이!"

"아직 안 물렸는데!"

"예방 오이야."

"예방 오이가 어딨어!"

"방금 만들었어."

그때 참치가 왔다.

정훈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으니까 무릎 위가 딱 고양이 자리였다. 참치는 당연하다는 듯 올라와서 정훈 허벅지 위에 자리를 잡고 앞발을 모았다. 정훈은 손이 묶여 있어서 밀어낼 수가 없었다.

"참치. 저리 가."

참치는 안 갔다.

"참치야 저리 가 줄래?"

"봐. 봤지? 고양이한테도 존댓말."

"넌 조용히 해."

"넵."

참치가 정훈 무릎에서 골골거리기 시작했다. 정훈은 손목에 나비 매듭이 달린 채 무릎 위에 고양이를 얹고 민아를 올려다봤다. 민아는 검은 슬립에 빨간 립스틱을 하고 나무 빨래집게를 들고 서 있었다. 노트 3번을 봤다.

"오늘 넌 내..."

뭐였지. 내 거. 내 거야. 맞나. 민아가 노트를 다시 봤다.

"커닝 페이퍼 있어?"

"없어."

"손에 든 게 뭔데."

"...쇼핑 목록."

정훈이 넘어갔다. 참치가 놀라서 뛰어내렸다. 정훈이 옆으로 쓰러져서 마룻바닥에 등을 대고 웃었다. 묶인 손을 배 위에 올리고 발을 구르면서 웃었다. 민아도 참았다. 3초 참았다. 4초째에 무너졌다. 슬립 차림으로 정훈 옆에 주저앉아서 같이 웃었다. 립스틱이 번지고 어깨끈이 흘러내리고 눈물이 났다. 배가 아팠다. 숨이 안 쉬어졌다.

"주실래요." 정훈이 중간중간 그 말만 했다. "무릎 꿇어 주실래요."

"그만해."

"쇼핑 목록."

"그만하라고!"

"예방 오이."

"그건 네가 했잖아!"

한참 뒤에 웃음이 잦아들었다. 둘 다 마룻바닥에 누워 있었다. 천장에 조명이 있고 조명 옆에 벌레 시체가 하나 붙어 있었다. 결혼 초부터 있던 건데 둘 다 안 뗐다. 참치가 저쪽 소파에서 이쪽을 경멸하듯 보고 있었다.

정훈 손목에 넥타이가 아직 묶여 있었다. 나비 매듭이 반쯤 풀려 있었다.

"근데." 정훈이 천장을 보고 말했다.

"뭐."

"네가 넥타이 잡아당겼을 때."

"언제."

"묶을 때. 감으면서 한 번 당겼잖아. 그때."

민아는 기억이 안 났다. 그냥 감다가 당긴 거였다.

"잠깐 진짜였어."

"뭐가."

"심장. 쿵 했어. 한 번."

민아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훈은 천장을 보고 있었다.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냥 말하는 얼굴이었다.

민아가 손을 뻗어서 넥타이 끝을 잡았다. 반쯤 풀린 매듭에서 늘어진 끝. 그걸 잡고, 당겼다.

정훈의 얼굴이 딸려왔다. 마룻바닥에서 고개가 민아 쪽으로 끌려왔다. 정훈은 저항하지 않았다. 눈이 민아를 봤다. 웃지 않았다.

민아도 웃지 않았다.

3초쯤 그렇게 있었다. 슬립 끈이 어깨에서 떨어져 있고, 립스틱은 입술 밖으로 번져 있고, 손에 12년 전 결혼식 넥타이를 쥐고. 정훈이 뭔가 말하려고 입술을 뗐다.

민아가 놨다.

"다음 주."

"...다음 주."

"오늘은 여기까지."

"응."

"근데 오늘 분리수거는 누가 해?"

정훈이 눈을 감았다. "나. 웃었으니까."

"세 번 웃었어."

"넌 한 번 웃었잖아."

"난 안 웃었어. 넘어진 거야."

정훈이 넥타이를 풀고 일어나서 진짜로 분리수거를 하러 나갔다.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병이랑 캔을 들고. 민아는 슬립 위에 가디건을 걸치고 창밖으로 정훈이 분리수거장에서 페트병 라벨 떼는 걸 봤다. 성실하게 떼고 있었다. 벌칙이니까.

그날 밤은 그냥 늘 하던 대로 했다. 정훈이 위였고 민아가 밑이었다. 근데 정훈이 중간에 한 번 민아 손목을 잡아서 머리 위로 올렸다. 늘 하던 거였다. 근데 그러면서 민아를 봤다. 평소보다 오래.

"뭐."

"아니." 정훈이 말했다. "그냥."

민아는 알았다. 정훈이 지금 뭘 생각하는지. 넥타이 끝을 잡고 당기던 손. 그 손이 지금 자기 밑에 깔려 있다는 것.

"다음 주야." 민아가 말했다.

"알아."

"그때까지 예습해."

정훈이 웃었다. 근데 이번엔 민아도 같이 웃었고, 그건 괜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