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애플은 전 세계 사람이 다 쓴다니까

합정역 3번 출구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이십 분 동안 정훈은 프린트물을 세 번 접었다 폈다.

"숙제가 네 개야."

"봤어."

"1번, 안전어 정하기. 2번, 신호등 시스템 합의. 3번, 역할 바꿔보기. 4번, 사후 체크인." 정훈이 종이를 민아 눈앞에 들이밀었다. "이게 마흔 넘은 부부가 토요일 오후에 십이만 원 내고 받아온 숙제야."

"커플 할인 받아서 십만 원."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중요한 건 3번이었다. 민아도 알았다. 워크숍 마지막 순서, 강사 레이가 "혹시 이번 주에 역할을 바꿔보고 싶으신 분?" 하고 물었을 때 손을 든 건 열두 커플 중에 민아 하나였으니까. 옆에서 정훈이 고개를 돌려 민아를 보던 그 얼굴. 놀란 것도 아니고 싫은 것도 아니고, 그냥 12년 만에 처음 보는 사람을 보는 눈.

"나 뭐 이상한 말 했어?"

"아니." 정훈이 종이를 다시 접었다. "그냥 몰랐어. 네가 그런 생각 하는 줄."

"나도 몰랐어. 손이 먼저 올라갔어."

이게 거짓말은 아니었다. 12년 동안 민아는 받는 쪽이었다. 정훈이 리드했고, 민아는 따라갔고, 그게 나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정훈은 손이 크고 따뜻했고 민아가 뭘 좋아하는지 눈 감고도 알았다. 문제는 그거였다. 눈 감고도 아는 것. 12년째 눈을 감고 있으면 가끔 궁금해진다. 위에서 보면 어떻게 생겼을까.

집에 들어오자 참치가 현관까지 마중 나왔다가 정훈 손에 프린트물이 있는 걸 보고 바로 돌아섰다. 고등어 무늬 등짝이 '또 뭘 배워왔어'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치킨 시킬까."

"시켜. 안전어부터 정하고."

"치킨부터 시키고."

치킨은 삼십오 분 걸린다고 했다. 삼십오 분이면 안전어 하나 정하기엔 충분하다고 민아는 생각했다. 그건 12년 살고도 남편을 잘 몰랐다는 뜻이었다.

"파인애플."

"안 돼."

"왜? 레이가 추천했잖아. 제일 많이 쓰는 거라고."

"그러니까 안 된다고." 정훈이 소파에 다리를 올렸다. "전 세계 사람이 다 쓰는 걸 왜 우리가 써. 우리만의 게 있어야지."

"우리만의 안전어를 누가 들어? 침실에 손님 오니?"

"기분 문제야."

"그럼 뭐."

정훈이 잠깐 생각했다. 진지하게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회사에서 배포 일정 잡을 때 짓는 얼굴.

"부장님."

"뭐?"

"우리 부장님. 그 소리 들으면 바로 다 죽어. 확실하게 멈춰."

"너만 죽는 게 아니라 내 기분도 죽어. 안전어는 너 혼자 멈추라고 있는 게 아니야. 둘 다 그 뒤에 괜찮아야지."

"그건 그렇네."

민아가 맥주를 땄다. "시어머니."

"우리 엄마를 왜."

"효과는 확실하잖아."

"효과가 너무 확실해서 일주일 가. 나 그 소리 들으면 그날 밤 아무것도 안 돼."

"그게 안전어의 목적 아니야?"

"안전어의 목적은 멈추는 거지 죽는 게 아니야."

둘 다 웃었다. 12년째 이런 식이었다. 뭐든 회의처럼 하는 남자와 회의를 끝내고 싶은 여자.

"세금." 정훈이 말했다.

"종합소득세." 민아가 받았다.

"그건 너무 길어. 급할 때 '종합소' 하다가 끝나."

"급할 때는 '종합'만 해도 알아듣지."

"그럼 종합비타민 얘기할 때마다 멈추게?"

치킨이 왔다. 순살 반 뼈 반. 정훈이 무를 뜯다가 젓가락을 멈췄다.

"오이."

"어?"

"안전어. 오이로 해."

민아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12년 동안 이 남자가 김밥에서 오이를 빼는 걸 봤다. 냉면에서 오이를 건져내는 걸 봤다. 시어머니가 오이소박이를 담가 보내면 민아 혼자 다 먹었다. 오이 얘기만 나와도 이 남자 얼굴이 굳는 걸 봤다. 정훈에게 오이는 채소가 아니라 사고였다.

"넌 오이 소리 듣는 것도 싫어하잖아."

"그러니까. 그 소리 들으면 진짜 멈춰. 반사적으로."

"그럼 넌 안전어 말할 때마다 오이 생각해야 하네?"

"그래서 진짜 필요할 때만 말하게 될 거야."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민아는 그게 정훈의 특기라는 걸 알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릴 논리적으로 해서 결국 그렇게 하게 만드는 것. 그렇게 결혼했고 그렇게 이 아파트를 샀고 그렇게 참치를 데려왔다.

"좋아. 오이."

"오이."

정훈이 맥주캔을 들었다. 민아가 부딪쳤다. 오이를 위하여. 마흔한 살과 서른아홉 살의 부부가 치킨 앞에서 오이를 위해 건배했다.

2번은 더 쉬울 줄 알았다.

"초록은 계속. 노랑은 좀 조절해. 빨강은 완전 정지." 민아가 프린트물을 읽었다.

"노랑이 뭐였지? 천천히?"

"'괜찮은데 좀 조절해줘.' 세기라든가 속도라든가."

"그럼 오이는?"

"오이는 빨강. 완전 정지."

"오이 하나면 되지 왜 세 개나 있어야 돼?"

"노랑이 있어야 빨강까지 안 가지. 중간에 '어, 이거 좀' 할 때가 있잖아."

"난 없는데."

민아가 정훈을 봤다. 정훈이 민아를 봤다.

"12년 동안 한 번도?"

"...그러니까 이런 워크숍을 가는 거지."

정훈이 뼈를 내려놓았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훈은 바로 알아들었고, 민아는 자기가 방금 그 말을 했다는 게 조금 놀라웠다. 12년 동안 노랑이 없었다는 게 아니라, 노랑을 말한 적이 없었다는 것.

"그럼 노랑도 있는 걸로." 정훈이 말했다. 가볍게. 하지만 종이 여백에 볼펜으로 '노랑 = 조절' 하고 적었다.

3번.

"근데 너 명령 할 수 있어?"

"뭐가."

"너 배달 기사한테도 '죄송한데요' 하잖아. 택배 아저씨한테 '혹시 괜찮으시면' 하고. 참치한테도 '참치야 내려와 줄래?' 하고. 명령을 해본 적이 있냐고."

"회사에선 해."

"'이거 내일까지 부탁드려요'가 명령이야?"

"그게 출판사에선 명령이야."

정훈이 웃었다. 민아가 쿠션을 던졌다. 참치가 그 쿠션 위에 올라앉았다.

"배워서 하면 되지." 민아가 말했다. "유튜브에 다 있어."

"뭐라고 검색하려고."

"몰라. 알아서 할 거야."

"검색 기록 지워."

"알아."

토요일로 정했다. 이번 주 토요일. 정훈이 조건을 하나 걸었다.

"웃으면 안 돼."

"너도."

"난 안 웃어."

"넌 내가 '무릎 꿇어' 하면 무조건 웃어. 내가 알아."

"...노력할게."

"노력 말고 그냥 웃지 마."

"그게 명령이야?"

민아는 잠깐 멈췄다. 그리고 목소리를 반 톤 낮췄다. "응."

정훈이 웃었다.

"봐. 봤지? 이래서 연습이 필요하다고."

그날 밤은 늘 하던 대로 했다. 정훈이 위였고 민아가 밑이었다. 정훈의 손이 민아의 허벅지 안쪽을 쓸어올리는 각도, 입술이 목에서 쇄골로 내려오는 속도, 안에 들어올 때 잠깐 멈췄다가 다시 미는 습관. 12년 된 방식은 눈 감고도 됐다.

근데 민아는 눈을 뜨고 있었다.

정훈의 얼굴을 봤다. 위에서 민아를 내려다보는 얼굴. 이마에 힘줄이 서고 턱에 힘이 들어가고, 민아가 소리를 내면 눈꼬리가 살짝 풀리는 얼굴. 저 얼굴을 12년 동안 밑에서 봤다. 저 자리에서 내려다보면 내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뭐 봐." 정훈이 멈췄다.

"너."

"왜."

"그냥. 예습."

정훈이 뭐라고 하려다 말고 다시 움직였다. 좀 더 세게. 민아는 그게 대답이라는 걸 알았다.

끝나고 나서 정훈이 천장을 보고 말했다.

"근데 오이 말고, 진짜 그만하고 싶을 땐 그냥 그만이라고 해도 돼."

"그럼 안전어가 왜 필요해."

"혹시 몰라서."

민아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12년 부부의 안전망은 원래 한 겹이 아니다. 오이가 있고, 그만이 있고, 그 밑에 손을 잡는 게 있고, 그 밑에 그냥 눈을 보는 게 있다. 정훈은 오이 하나만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게 이 남자와 12년을 산 이유였다.

"알았어. 오이랑 그만이랑 둘 다."

"응."

"근데 넌 오이만 써."

"왜."

"내가 그만이라고 하면 넌 진짜 그만하는 줄 알잖아. 근데 넌 그만이라고 하면서 계속 할 사람이야."

"...맞네."

정훈이 돌아누웠다. 민아는 일어나서 냉장고에 메모를 붙였다. 포스트잇 노란색.

'토요일. 안전어: 오이. 역할: 바꿈.'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 밑에 정훈 글씨로 한 줄이 추가되어 있었다.

'웃지 말 것 (둘 다).'

참치는 그 메모 밑 냉장고 앞에 배를 깔고 자고 있었다. 뭘 지키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