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에 붙은 건 집안일 표예요

일요일 오후 두 시, 인터폰이 울렸다.

"나야. 근처 왔다가."

수진이었다. 대학 동기. 3년 전에 이혼하고 혼자 사는데 눈치가 백 단이었다. 남의 집에 들어와서 5분이면 그 집 부부가 지난주에 싸웠는지 안 싸웠는지 알아맞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지금 1층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민아는 현관에서 거실을 돌아봤다.

식탁 의자에 와인색 리본이 걸쳐져 있었다. 어제 쓰고 그냥 둔 것. 소파 위에 검은 안대. 참치가 물고 다니다 놓은 것. 그리고 냉장고.

'벌칙 목록
정훈: 말대꾸 3회 → 설거지 + 10대
정훈: 웃음 1회 → 분리수거
정훈: '넵' → 자 5대
정훈: 40분 엎드려 있기 → 잘함 (보상: 토요일 원하는 거)'

마지막 줄은 정훈이 자기 손으로 썼다. 보상 부분에 밑줄까지 쳐가면서.

민아는 리본을 커튼 묶는 데 감았다. 원래 그런 용도였던 것처럼. 안대는 소파 쿠션 밑에 밀어넣었다. 냉장고까지 갔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포스트잇을 떼려는데 손톱에 걸렸다. 반만 떼졌다. 초인종이 또 울렸다.

"가요!"

손바닥으로 포스트잇을 냉장고에 도로 눌러 붙이고 문을 열었다.

"뭐야, 왜 이렇게 늦게 열어."

"화장실."

수진이 들어오면서 집을 한 바퀴 훑었다. 눈이 커튼에 잠깐 멈췄다. 와인색 리본. 뭐라고 안 했다. 민아는 등에 땀이 났다.

"커피? 맥주?"

"맥주."

수진이 냉장고로 갔다.

민아가 몸으로 막았다.

"뭐야."

"내가 꺼내줄게. 앉아."

"왜 냉장고 앞에 서 있어. 뭐 숨겼어?"

"아니, 집안일 분담표. 창피해서."

"집안일 분담표가 뭐가 창피해." 수진이 민아 어깨 너머로 고개를 뺐다. "어디, 뭐라고 썼—"

현관문이 열렸다.

정훈이었다. 마트 갔다 오는 길. 양손에 장바구니. 들어오다가 수진을 보고 멈췄다.

"어…"

"정훈씨. 오랜만이에요."

"아, 네. 오랜만이에요."

"얼굴 좋네요. 뭐 좋은 일 있어요?"

"...아뇨."

정훈 얼굴이 빨개졌다. 귀까지. 수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민아는 그 틈에 포스트잇을 뜯어서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앞치마를 왜 입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아침에 입고 안 벗었다.

수진은 한 시간 있었다. 맥주 두 캔. 얘기는 수진 회사 얘기, 수진 전남편 얘기, 수진이 요즘 소개팅한 남자 얘기. 민아는 열심히 들었다. 정훈은 안방에서 안 나왔다. 장바구니만 놓고 들어가더니 문을 닫았다.

"정훈씨 왜 안 나와?"

"일해. 월요일에 배포 있대."

"일요일에?"

"IT는 그래."

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믿는 얼굴로.

나갈 때 현관에서 수진이 신발을 신으면서 말했다.

"너네 뭐 있지."

"뭐가."

"얼굴이 둘 다 기름져. 좋은 쪽으로."

"뭐래."

"말 안 해도 돼." 수진이 신발 뒤축을 당겼다. "근데 하나만. 냉장고에 '자 5대'는 뭐야?"

민아는 죽었다.

"...자로 재는 거야. 길이. 5대. 아니, 5센티. 참치 밥그릇 위치."

"어."

"그래."

"그래."

수진이 나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웃음을 참는 어깨가 보였다.

민아는 문을 닫고 안방으로 갔다. 정훈은 노트북 앞에 있었는데 화면이 꺼져 있었다.

"갔어."

"응."

"들킬 뻔했어. 냉장고 거. 반만 떼져서." 민아가 앞치마에서 포스트잇을 꺼내 흔들었다. "'자 5대' 봤대. 나 참치 밥그릇 위치라고 했어. 5센티."

정훈이 웃지 않았다.

"냉장고 거 떼자."

"뗐잖아. 지금."

"아니, 앞으로. 안 붙이자."

"왜? 아무도 안 봐. 수진이야 갑자기 온 거고."

"그냥."

민아는 침대에 앉았다. 정훈은 노트북을 봤다. 꺼진 화면을.

"이번 주말에 나 새로 산 거 있어. 인터넷으로."

"뭔데."

"비밀. 근데 부드러운 거야. 안 아파. 그니까—"

"이번 주는 그냥 원래대로 하자."

"...원래대로?"

"내가 할게. 예전처럼."

민아는 정훈을 봤다. 정훈은 화면을 봤다.

"왜?"

"피곤해서."

"받는 게 피곤해?"

"그냥 그렇게 하자."

"정훈아."

"응."

"나 봐."

정훈이 봤다. 잠깐. 그리고 다시 화면을 봤다.

"알았어." 민아가 말했다. "원래대로."

토요일 밤. 정훈이 위에 있었다.

늘 하던 대로였다. 정훈 손이 민아 허벅지 안쪽을 쓸어올렸다. 입술이 목에서 쇄골로. 손이 가슴을 감쌌다. 젖꼭지를 엄지로 굴렸다. 12년 된 순서. 눈 감고도 되는 순서.

근데 정훈은 눈을 감고 있었다.

민아는 눈을 뜨고 있었다. 위에 있는 정훈 얼굴을 봤다. 이마에 힘줄. 턱에 힘. 그건 있었다. 근데 민아가 소리를 냈을 때 눈꼬리가 풀리지 않았다. 정훈은 어딘가 다른 데 있었다. 손은 여기 있는데 사람은 없었다.

정훈이 들어왔다. 늘 하던 대로 잠깐 멈췄다가 밀었다. 민아는 젖어 있었다. 몸은 반응했다. 근데 뭔가 비었다. 정훈이 움직였다. 규칙적으로. 배포 일정처럼.

민아는 12년 동안 노랑을 말한 적이 없었다.

"노랑."

정훈이 즉시 멈췄다.

그건 됐다. 안전어는 됐다. 워크숍 12만 원이 여기서 제 값을 했다. 정훈은 멈추고, 민아 위에서 몸을 들고, 민아를 봤다.

"왜. 아파?"

"아니."

"그럼."

"네가 없어."

정훈이 아무 말도 안 했다.

"손은 여기 있는데 넌 어디 있어?"

정훈이 민아 옆으로 내려왔다. 등을 대고 누웠다. 둘 다 천장을 봤다. 조명 옆 벌레 시체. 12년째.

"미안."

"미안하다는 말 말고."

"...뭐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어."

민아는 기다렸다. 정훈은 아무 말도 안 했다. 5분. 10분. 정훈이 돌아누웠다. 민아는 정훈 등을 봤다.

내가 뭘 잘못했나.

너무 셌나. 자 때문에? 그날 정훈이 온몸을 떨었던 게, 좋았던 게 아니라 뭔가 무너진 거였나. 자존심. 남자가. 마흔한 살 팀장이 마누라한테 자로 맞고 낑낑거린 게, 다음 날 아침에 생각해보니 싫었나. 그래서 원래대로 하자고 한 건가. 원래대로 자기가 위에 있으면 되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근데 그날 밤 정훈 얼굴. 눈이 풀리고 뭔가 놓아버린 얼굴. 그건 좋았던 얼굴 아니었나. 민아는 12년 동안 이 남자 얼굴을 봤는데, 그 얼굴은 처음이라 뭔지 몰랐다.

정훈은 그날 밤도 안 잤다.

민아 숨소리가 고르게 되는 걸 들었다. 등 뒤에서. 돌아누워서 민아를 보고 싶었는데 못 봤다. 보면 말해야 될 것 같아서. 뭘 말해야 되는지 몰라서.

좋았다. 그게 문제였다.

자로 맞으면서, 시트에 자지를 흘리면서, 민아 밑에서 온몸을 떨면서, 정훈은 태어나서 제일 편했다. 회사에서 팀장이고 집에서 남편이고 시댁에서 장남이고, 12년 동안 위에서 리드하고 챙기고 결정하는 게 자기인 줄 알았는데. 엎드려서 40분 기다리는 게 제일 자기 같았다. 그게 뭔지 몰라서 무서웠다. 수진이 '얼굴 좋네요' 했을 때 그게 얼굴에 써 있는 것 같아서 도망쳤다.

원래대로 하면 돌아갈 줄 알았다. 안 돌아갔다. 위에 있으면서 정훈은 계속 밑을 생각했다.

민아가 노랑이라고 했을 때, 솔직히 고마웠다.

월요일 아침. 정훈이 먼저 나갔다. 민아가 일어나 보니 냉장고에 포스트잇이 없었다. 앞치마 주머니에 넣어둔 거. 쓰레기통에 있었다. 반으로 접혀서.

민아는 그걸 꺼냈다. 펴서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40분 엎드려 있기 → 잘함 (보상: 토요일 원하는 거).' 정훈 글씨. 밑줄.

서랍에 넣었다. 버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