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엔 없던 조항
* 100% 창작 판타지입니다. 실존 인물과 무관합니다.
1.
계약서에 도장을 찍던 날, 나는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되물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3개월. 주 2회. 장소는 여기, 을지로 지하 스튜디오." 그가 서류를 내 앞으로 밀며 말했다. "규칙은 간단해. 여기 있는 동안 네 이름은 없어. 내가 부르는 대로만 대답한다."
이재현. 회사에서는 냉철하기로 소문난 투자사 대표였고, 밖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얼굴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 밑에서 인턴으로 일하다가, 어쩌다 그의 취미를 알게 됐고, 어쩌다 그 취미의 상대가 되기로 했다.
"이름이 없으면 뭐라고 부르시게요." 내가 묻자 그는 내 턱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토끼."
그날 이후로 나는 사무실에서는 김서인이었고, 지하 스튜디오 문을 넘는 순간부터는 그의 토끼가 되었다.
2.
첫 세션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체계적이었다. 재현은 벽 한쪽에 걸린 도구들을 하나씩 짚으며 설명했다. 가죽 크롭, 로프, 아이 마스크, 그리고 이름 모를 것들.
"오늘은 눈부터." 그가 아이 마스크를 씌우며 낮게 말했다. "보이지 않으면 다른 감각이 예민해지거든."
시야가 완전히 차단된 채로, 나는 그의 손이 어깨선을 따라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손끝이 스칠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로프가 손목을 감았다. 매듭 하나하나가 조여질 때마다 나는 숨을 참았다.
"아파?" 그가 물었다.
"아니요… 아니, 근데…"
"근데?"
"조금 더 세게 해주셔도 돼요."
그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렸다. "성급하네, 토끼."
3.
세 번째 세션쯤 되자 나는 그의 리듬을 읽을 수 있게 됐다. 그는 절대 서두르지 않았다. 벌을 줄 때도, 상을 줄 때도 늘 계산된 속도로 움직였다.
"오늘은 벌이 있어." 그가 의자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난주에 내 허락 없이 신음 냈지."
"그, 그건…"
"변명은 안 듣는다고 했을 텐데."
그가 손짓하자 나는 스튜디오 중앙, 나무 스탠드 앞으로 걸어갔다. 손목이 머리 위로 묶이고, 발끝이 겨우 바닥에 닿을 만큼 몸이 당겨졌다. 크롭이 허벅지 안쪽을 스칠 때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소리 내지 마." 그가 등 뒤에서 속삭였다. "낼 때까지 계속할 거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손길에는 늘 서인을 살피는 순간이 섞여 있었다. 세게 몰아붙이다가도 내 숨소리가 흐트러지면 잠깐 멈춰 손등으로 뺨을 쓸어주었다. 그 온도차가 나를 매번 무너뜨렸다.
"잘했어." 세션이 끝나면 그는 늘 매듭을 풀어주며 그렇게 말했다. 그 한마디를 듣기 위해 나는 매주 지하 스튜디오 계단을 내려갔다.
4.
문제는 계약이 끝나갈 무렵 생겼다.
"3개월 끝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어느 밤, 매듭을 풀어주는 그의 손을 붙잡으며 내가 물었다.
재현이 잠깐 멈췄다. 평소라면 답을 미루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그날은 한참 말이 없었다.
"계약서엔 없던 조항이 하나 생겼어." 마침내 그가 말했다. "토끼가 아니라 서인을 원하게 됐다는 거."
나는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이 관계, 계약 없이 계속하고 싶다는 뜻이야." 그가 내 손목의 로프 자국을 손끝으로 쓸며 낮게 말했다. "네가 원한다면."
지하 스튜디오의 조명이 어둑하게 우리를 비췄다. 나는 대답 대신 그의 셔츠 깃을 붙잡았다.
"조항 하나 추가해도 돼요?"
"뭔데."
"이번엔… 눈가리개 없이 하고 싶어요. 얼굴 보면서."
그가 처음으로, 계산되지 않은 웃음을 지었다.
- 끝 -